노은님 서울여대 교수가 18일 개막한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의 개인전에 출품한 ‘어느 봄날’.
노은님 서울여대 교수가 18일 개막한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의 개인전에 출품한 ‘어느 봄날’.
서양화가 노은님 서울여대 석좌교수(73·사진)가 독일 함부르크 땅을 밟은 지 올해로 꼬박 50년이 됐다.

"천진난만한 붓질과 색채로 노자의 무위자연론 녹였죠"
전북 전주에서 유복한 가정의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1970년 간호보조원을 모집하는 신문광고를 보고 무작정 함부르크로 떠났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나날이었지만 함부르크 병원에서 중환자와 행려병자 등을 보살피는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1973년 함부르크 국립 미술대학에 진학했고,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이곳 국립 조형예술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유럽 화단에서 ‘독일 표현주의 거장(巨匠)’으로 불릴 만큼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그의 작품 ‘해질 무렵의 동물’은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렸다.

1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시작한 노 교수의 개인전은 독일로 파견된 한국의 간호보조원이 고단한 이국 생활을 화심(畵心)으로 달랜 50년 인생 역정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이는 자리다. ‘힘과 시(詩)’란 제목을 붙인 이번 전시에는 천진난만한 붓질과 강렬한 원색의 색채로 꽃, 물고기, 동물 등을 그린 대형 회화 30여 점이 걸렸다.

차갑고 어려운 현실을 헤집고 독일로 떠났던 그는 삶의 희망을 붓끝으로 구하는 ‘그림 간호사’로 살며 상처 난 세상을 따스한 선과 색채로 다독였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처럼 ‘무지개를 바라만 보아도 가슴 뛰는 삶’을 추구한 그의 인생이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노 교수는 “이국 생활 반세기 동안 제게 그림은 ‘삶의 숙제를 푸는 도구’가 됐고, 어엿한 예술가로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작가는 독일의 신표현주의 운동에 동참하면서 인간의 소통 문제를 회화로 표현해왔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가르친 한스 티만 교수를 만나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1986년에는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 거장들과 함께 ‘평화를 위한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림을 ‘포용의 미학’으로 간주한 그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체취를 무던히 좇아 왔다.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뒷동산에서 강아지와 뛰놀던 옛 기억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녹이고, 잊고, 들여다봤다. 벌 받은 사람처럼 지낸 이국 생활에서 욕심을 덜어내는 방법도 배웠다. 그는 “이 시대의 화가는 위로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감동을 통해 행복을 전해야 한다는 화두를 부여잡고 매일 그림에 정진했던 가난한 화가의 회한이 사무친다.

그는 유럽 표현주의 미술에 동양철학의 본질인 노자의 무위자연론을 접목했다. 자연을 변형시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일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자재의 경지에서 살아 숨쉬는 생물의 자태를 빚어낸다. 작품에는 밝은 생명의 기운이 담겨 있다. 천진하고 소박한 느낌도 준다.

“구상을 따로 하지 않습니다.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요. 감성에 깊이 빠져들며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리다 보면 그것이 곧 작품이 된 거죠.” 유럽 화단에서 그의 이름 앞에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 ‘그림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까닭이다.

그는 “아이처럼 자연을 배우고, 들여다보면 ‘행복’이란 꽃이 활짝 핀다”며 “철 따라 나오는 자연의 색깔들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아침이슬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저는 항상 벌 받는 사람처럼 때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 당나귀였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어요.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장난꾸러기 아이가 놀고 싶어 합니다.”

노 교수는 다음달 4일까지 가나아트 한남점에서 소품과 조각전도 펼친다. 11월에는 독일 남부 미헬슈타트시립미술관에 자신의 이름을 단 전시실 개관기념전도 연다. 전시는 다음달 18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