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본주의에 입각한 조선왕조…中·日과 민간무역 금지로 경제 침체
농본주의

조선왕조의 경제정책은 농본주의에 입각했다. 14세기에 성행한 민간의 대외무역은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중국과의 무역은 정부 주도의 사행(使行)무역으로 이뤄졌다. 일본과의 무역도 지정된 곳에서 양국의 상인이 만나는 공무역의 형태였다. 조선왕조 5세기 동안 중국과 일본으로 배를 띄운 조선 상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민간 무역의 철저한 금지는 조선 경제가 서서히 정체해 가는 원인이 됐다.

조선왕조는 국내 상업도 억제했다. 그에 따라 고려 이래로 군현의 중심에서 열리던 장시가 사라졌다. 그 대신 정부의 허가증을 받은 행상이 각지를 다니며 지역 간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을 도왔다.

租庸調의 세상

국내외 시장이 억압된 가운데 재화의 가장 큰 흐름을 이룬 것은 조선왕조의 현물재정이었다. 조선왕조는 중국 당(唐)의 제도를 본받아 토지와 농민으로부터 조용조(租庸調)의 세 가지 세(稅)를 수취했다. 조(租)는 논밭에서 수취하는 쌀과 콩의 조세를 말한다. 용(庸)은 성을 쌓거나 도로를 닦을 필요 등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함을 말한다. 조(調)는 철, 과일, 약재, 비단, 종이와 같은 지방 특산물을 수취함을 말하는데, 보통은 공물(貢物)이라 했다.

공물은 수령이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해 생산하거나 제작하기도 했다. 이에 용과 조(調)는 잘 구분되지 않았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공물이었다. 공물 비중이 커짐에 따라 수확량 대비 조의 율은 10분의 1에서 20분의 1로, 나아가 그 이하로 낮아졌다.

조선왕조는 세 가지 세 이외에 상민 신분의 남정에게서 연간 면포 2필을 군역의 명분으로 수취했다. 19회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토지의 유무나 다과를 묻지 않은 순전한 개별 인신 지배체제였다. 조선왕조의 인신 지배는 공업에까지 미쳤다. 조선왕조는 전국의 장인(匠人)을 등록시키고 업종과 작업장의 규모에 따라 장인세를 수취했다. 그 위에 장인을 교대로 징발해 중앙정부와 군현의 작업장에 배속시킨 다음 각종 재화를 제작하게 했다. 조선왕조가 영위한 방대한 규모의 관영 수공업은 공산품의 상업적 생산과 유통을 배제한 점에서 그의 농본주의 지향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경기 밀양 고법리 박익(1332~1398)의 묘에 있는 벽화. 고려왕조 때인 14세기 비(婢)를 포함한 여인들의 모습이 저고리의 품새만큼이나 자유로워 보인다.
경기 밀양 고법리 박익(1332~1398)의 묘에 있는 벽화. 고려왕조 때인 14세기 비(婢)를 포함한 여인들의 모습이 저고리의 품새만큼이나 자유로워 보인다.
재분배경제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는 재분배경제였다. 중앙권력이 지방의 잉여를 자신의 창고로 집중한 다음 필요한 곳으로 또는 필요한 때에 지출함으로써 경제생활 통합을 달성하는 것이 재분배경제다. 조선왕조는 백성으로부터 수취한 세 가지 세와 군포를 정부기관의 비용과 양반관료의 녹봉으로 분배했다. 일부를 남겨서는 흉년 대책으로 저장했다. 왕실과 양반관료의 납공노비들이 바치는 신공도 재분배경제의 큰 흐름을 차지했다.

재분배경제는 지배신분 간의 활발한 선물(膳物) 교환을 동반했다. 양반관료가 남긴 일기에서 그 점을 잘 살필 수 있다. 이문건(1494~1567)은 승지 출신의 고급 관료인데, 226개월 동안 6346회의 선물을 수취했다. 관찰사 출신의 유희춘(1513~1577)이 수취한 선물은 120개월 동안 2855회에 달했다. 선물의 일부는 노비들이 바친 신공이지만, 그보다 군현의 수령으로 나간 후배 관료들이 백성으로부터 거둔 공물의 일부를 선물한 것이 훨씬 많았다. 선물의 종류는 곡물, 면포, 꿩, 닭, 과일, 땔감 등 주요 생활자료에 두루 걸쳤다. 이 두 관료의 가정경제에서 시장거래는 거의 없었다. 필요한 생활자료의 대부분이 선물경제로 공급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5세기에 걸쳐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전반적으로 악화됐다. 저고리의 앞길이 점점 짧아진 데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맨 위는 15세기, 중간(두 번째·세 번째)은 16~18세기, 맨 아래는 19세기의 저고리다. 모두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이다.
조선시대 5세기에 걸쳐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전반적으로 악화됐다. 저고리의 앞길이 점점 짧아진 데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맨 위는 15세기, 중간(두 번째·세 번째)은 16~18세기, 맨 아래는 19세기의 저고리다. 모두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이다.
시장경제는 아직 미명(未明)의 지평선 건너에 있었다. 왕조 성립과 더불어 농촌에서 사라진 장시가 다시 생긴 것은 15세기 후반의 전라도 연해에서였다. 중앙정부는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여 장시의 발생을 묵인했다. 이후 장시는 전국적 범위로 확산됐다. 장시는 처음에는 월 1~2회의 뜸한 빈도로 열렸는데, 16세기 말이면 5일마다 열리기도 했다. 장시 사이의 긴밀한 네트워크는 아직 미성립이었다. 장시는 가난한 농민과 노비가 출입하면서 남고 모자라는 생활자료를 상호 교환하는 장소로 기능했다.

향도

상민과 노비 신분의 서민은 향도(香徒)라는 공동체에 소속했다. 그것은 왕조의 지배체제와는 별개의 질서였다. 향도란 원래 부처 미륵의 강신(降神)을 발원하는 신앙단체를 말했다. 고려시대에는 군현이 하나의 향도였지만, 조선에 이르러 그 범위가 리(里)로 축소됐다.

조선왕조는 향도를 억압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전국 곳곳의 마을에 향도가 있어 서로 약속을 맺고 단속을 하는데, 부모가 죽으면 이웃을 모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화장해 그 재를 뿌리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했다. 향도의 역할은 전통 신앙에 바탕을 둔 장례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질서를 규율하는 계(契)로서 농번기에는 공동노동을 조직하고 농한기에는 축제를 거행했다. 왕조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16세기까지 향도 공동체는 건재했다.

주비

향도는 여러 주비로 이뤄졌다. 주비는 대개 8결의 토지를 단위로 결성됐다. 주비의 한자 표기는 矣이다. 원래 夫라는 글자 위에 점을 찍은 모양인데, 그와 정확히 일치하는 한자가 없어서 가장 비슷한 형태를 취한 것이 矣이다. 여러 사람(夫)의 이름을 열거한 다음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뜻으로 선을 긋고 점을 찍은 모양이 주비다. 그러니까 주비는 일정한 규격으로 묶인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 기원은 신라와 고려의 정호(丁戶)로 올라간다. 토지와 인구에 대한 조선왕조의 새로운 지배체제에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의 농민공동체는 놀라울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했다.

승지 출신인 이문건은 1545년 이후 22년간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주비는 조세와 공물의 수취 단위였다. 주비의 대표는 주비에 할당된 공물을 공동으로 채취하거나 제작해 성주목에 납부했다. 기한을 어긴 대표는 성주목에 끌려가 갇히거나 매를 맞았다. 주비에 할당되는 공물의 품목은 해마다 달랐다. 겁성이란 사람이 대표인 주비는 1545년에는 꿀을, 다음 해는 비단을, 그다음 해는 닥나무를 바쳤다. 어느 해에는 은어와 노루를 잡아 바치기도 했다. 이문건의 일기는 주비로 묶인 농민공동체가 왕조의 각종 수탈을 얼마나 가쁜 숨결로 버티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여성의 종속

고려시대까지 여성은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권(同權)이었다.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법이나 정책이 강구된 적은 없었다. 가족제와 친족제는 모계제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가재(家財)의 상속에서 남녀는 평등했다. 여인의 재가는 도덕적 흠결이 되지 않았다. 남자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중혼(重婚)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복수의 처들은 평등했으며, 처첩(妻妾)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사에서 여성이 남성에 종속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일이다. 1413년 태종은 중혼을 금지하고 단혼(單婚)을 법제화했다. 기왕의 중혼에 대해서는 복수의 처가 양반 신분임에 한해서 모두 적처(嫡妻)의 지위를 인정했다. 사족이 아닌 처는 첩으로 지위가 강등돼 적처와 차별됐다. 그렇게 생겨난 처첩제와 그에 따른 적서(嫡庶)의 차별과 대립은 조선왕조 5세기에 걸쳐 가장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원천을 이뤘다.

양반 신분의 여인이 교제할 수 있는 범위는 내외 3촌으로 한정됐다. 그 밖의 친족이나 족외인과 접촉하는 것은 실행의 혐의로 비판됐다. 여인들이 산천에서 유흥을 벌이거나 절에 올라가는 행위는 도덕적 이탈로 간주됐다. 여성에 대한 가장 비인간적 공격은 재가(再嫁)의 금지였다. 재가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된 적은 없다. 그에 관한 성종조의 논의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국대전》에 실린 이 법은 어느덧 양반 신분의 여인은 재가할 수 없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젊은 여인이 과부가 돼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비인간적이며 유교의 본뜻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매번 실패했다. 재가는 금수나 하는 짓이라는 교조적 반론은 찬성자가 소수이지만 언제나 조정의 공론을 굳건하게 장악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