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범 화백이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한 5m 크기의 대작 ‘마운틴 페스티벌(Mountain festival’)을 설명하고 있다.
김가범 화백이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한 5m 크기의 대작 ‘마운틴 페스티벌(Mountain festival’)을 설명하고 있다.
요즘 미술시장의 테마주는 단색화와 추상화다. 김환기 유형국 정상화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등 작가들의 단색 추상 그림이 국내외에서 잇달아 전시되고 아트페어와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1970년대 국내 화단에 불었던 단색화 바람이 지금에야 평가받고 있지만, 10년 전 이미 미국, 유럽, 중국, 일본에 한국의 단색화를 알린 작가가 있다. 소록도 한센인 후원단체 참길복지의 회장을 맡고 있는 김가범 화백(71)이 그 주인공이다.

최근 그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시립미술관과 중국 베이징미술관, 일본 도쿄 닛치갤러리에 이어 지난달 금호미술관의 초대를 받았다. 구상과 추상이 어우러지고, 색의 미감을 강조하는 서양화와 점과 선의 미학을 중시하는 동양화가 공존하는 작품이라는 게 초청 이유다. 김 화백은 오는 9일까지 여는 이번 전시에 지난 20여 년 동안 작업한 반구상 형태의 산 그림부터 색점으로 꾸민 기하학적 추상화까지 100호 이상 대작 20여 점을 풀어놓았다. 인상파의 거장 폴 세잔이 오랫동안 생빅토와르 산과 대화를 나눈 것처럼 작업실 창문 너머 우면산에서 얻은 감흥을 나이프와 붓으로 물감을 수천 번 긁어내고, 색칠한 결과물이다.

지난달 30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 화백은 “마치 아픈 곳을 치유하는 의사처럼, 길을 찾는 수도승처럼…, 그렇게 산속에서 찾아낸 귀한 풍경을 색채미학으로 버무려 회화의 속성을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작품에는 색 덩어리들이 꿈틀거린다. 빛의 효과에서 오는 시각적 감흥과 형상의 자취 때문이다. 산세의 경이로움으로부터 빛과 생명력을 찾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꿈과 행복의 아름다운 조화를 꾀했다. 그의 그림이 ‘생명의 회화’로 불리는 까닭이다. 스스로도 자신의 그림 뼈대를 빛과 생명을 내재한 추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작가는 “묵직하게 느껴지는 산에서 도약의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을 뽑아낸다”고 했다. 그는 매일 10시간 이상 화폭 앞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부드럽고 순화된 색채로 산을 통해 ‘한국다움’을 표현한다. 걸쭉하게 갠 유성물감을 나이프에 듬뿍 묻혀 바탕색을 칠한 뒤 적당히 말랐을 때 표면을 나이프로 긁어내고, 다시 다른 색의 바탕색을 칠해 긁어내는 작업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푸른색과 검정, 그리고 흰색이 가미된 작품들은 평면적인 단색조의 바탕에서 어렴풋이 산이 떠오른다.

“성격상 붓은 사용의 폭이 좁고 성에 안 차 나이프를 주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물감을 나이프에 듬뿍 묻혀 캔버스 위를 누비듯이 발라나갈 때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그렇다고 해서 붓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점을 찍거나 디테일 처리를 할 때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붓도 사용한다.

김 화백이 이처럼 산으로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뭘까. 그는 우리 산들은 ‘생명의 화합과 축제’란 점에 주목했다. 산마다 색다른 영기(靈氣)가 느껴지는 데다 회화 창작의 알토란 같은 소재,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단색화 계보를 잇고 있는 김 화백은 어릴 적 유난히도 색감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젊은 시절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에 뽑히고도 보수적인 집안의 반대로 본선에 가지 못했던 그는 끼를 살려 부모 몰래 혼자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미술대학을 가려고 했으나 “시집이나 가지. 뭐 하러 어렵게 미술을 하려고 하느냐”는 부모님의 만류로 화가의 꿈을 접었다.

그가 붓을 잡은 건 1995년이다. 사업하는 남편을 따라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면서 미술학교 ‘노스리지’와 ‘피어스칼리지’를 다녔다. 초기에는 주로 파스텔 화풍의 정물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하지만 곧바로 단색화에 빠져 산의 정신을 색채 미학으로 녹여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