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어제가 없는 남자' 둘러싼 뇌과학자들의 이야기
공장 노동자였던 헨리 구스타프 몰래슨(1926~2008)은 간질을 치료하기 위해 1953년 뇌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뇌엽절제술을 받았다. 정신의 문제를 뇌에 대한 외과수술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른바 ‘정신외과의사’들에 의해서였다. 수술 뒤 몰래슨은 간질을 없애기는커녕 심한 기억상실증을 앓았다. 의사들이 수술하며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을 잘라낸 결과였다. 그는 이후 약 60년간 뇌과학 연구자들에게 수백 번에 이르는 연구와 실험을 당하며 ‘인간 실험쥐’가 됐다. 그에 대한 연구는 뇌과학, 특히 인지 기능과 관련된 지식 축적에 엄청난 성과를 냈다.

미국 저널리스트 루크 디트리치가 쓴 《환자 H.M.》은 몰래슨을 둘러싼 뇌과학 연구에 관한 기록이다. 몰래슨의 뇌를 의학적으로 관찰한 결과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몰래슨의 뇌 연구가 의학 발전에 끼친 영향, 그의 뇌를 독점하기 위해 뇌과학 연구자들이 벌인 경쟁, 뇌과학 연구를 통해 본 인간 정신의 신비와 광기 등을 설명한다. 의학계가 지식 추구라는 이름으로 환자에게 한 야만적 행위도 폭로한다. 한 편의 뇌과학 다큐멘터리이고 때로는 스릴러처럼 읽힌다. 저자는 몰래슨의 기억을 영구 상실하게 한 수술 집도의 윌리엄 비처 스코빌 박사의 외손자다. 그러나 스코빌이 가족의 일원이라고 해서 그가 저지른 의료사고와 비윤리적 행위를 감싸주지는 않는다.

저자는 몰래슨과 만나 대화했던 일에 대해 설명한다. 몰래슨은 저자가 얘기하면 경청한다. 맞장구도 쳐주고 심지어는 충고도 한다. 그러나 잠시 지나면 몰래슨은 저자가 했던 얘기를 잊어버린다. 저자는 이런 몰래슨을 보며 “가슴이 아렸다”고 한다. 그는 “몰래슨은 현재라는 허허벌판에 갇혀 흐릿한 과거와 닿을 수 없는 미래 사이에서 영원히 기나긴 외줄을 타고 있었다”고 말한다. 몰래슨에게는 눈앞에 있는 세계만 존재했다. 이 한 명의 선한 청년을 연구하고 성과를 내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해 뇌과학자들이 경쟁한다. 저자는 이런 뇌과학자들을 두고 “몰래슨이 잃어버린 것(기억)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얻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MIT의 수전 코킨 박사는 몰래슨을 깊이 연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코킨은 몰래슨에 대해 쓴 책을 디트리치보다 먼저 내기 위해 그와 경쟁했다. 저자는 “코킨은 몰래슨에 대한 정보를 숨기거나 윤리적 문제가 있는 실험도 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코킨은 책을 먼저 냈다. 코킨의 책은 국내에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돼 있다. 《환자 H.M.》 출간으로 두 경쟁자의 책이 국내에서 모두 나와 몰래슨에 대한 기록이 균형을 갖추게 됐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