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초 파란 줄기 속에 - 고형렬(1954~)

[이 아침의 시] 사랑초 파란 줄기 속에 - 고형렬(1954~)
겨울 사랑초 줄기 하나에 잎이 하나
사랑초는 한낮 잎에 나와 뛰어놀았다
운동장은 지문만 했다
태양은 그 지문에만 내려주었다
사랑초는 창밖 찬 바람 소리를 듣고
으스스 몸을 떨었다

사랑초의 사랑은 저 실줄기로만 간다
일억 오천만 킬로미터 아래에서
끊어지지 않고 건너간다
말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다
겨울 사랑초 줄기 하나가 잎을 물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가 약 1억5000만㎞라고 해요. 그 어마어마한 거리의 태양 아래서 생명을 얻고 말을 얻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지요. 말은 사랑초의 것이기도 해요. 겨울 사랑초 줄기 하나에 잎이 하나. 그 하트 모양 잎 하나는 사랑초가 건네는 말일 텐데. 실줄기로만 가는 사랑의 힘으로 피운 건 작고 부드러운 말 한 잎, 바로 사랑이에요. 어쩌면 우리가 오늘 누군가에게 건너가 피우고 싶은 맑은 말. 사랑초 파란 줄기 속에서 희망처럼 기쁨처럼 피어나는 말이지요.

김민율 < 시인(2015 한경 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