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선 똑바로 보는 일… 그게 바로 영웅적인 행위
‘작가들의 작가’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에게 어울리는 작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가슴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작가’….

미국 소설가 제임스 설터(1925~2015·사진)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만큼 설터의 문장은 빠르고 간결하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막강한 흡입력을 지닌다. ‘농축된 문장’을 쓰기 위해 오래 고심하고 공들이던 설터는 평생 8권의 소설밖에 쓰지 못한 ‘과작 작가’였다.

삶의 위선 똑바로 보는 일… 그게 바로 영웅적인 행위
신작 《아메리칸 급행열차》(마음산책)는 그가 남긴 두 권의 단편집 중 하나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11편의 작품은 얼핏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가 집중한 것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민낯’이다. 설터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애써 눈감으며 피해온, 부끄럽고 창피한 순간을 똑바로 쳐다보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외로웠던 순간, 불안감에 몸서리치던 순간, 혹은 수치스러운 순간을 거침없이 포획해 독자들에게 보여낸다.

그런 그의 의도가 가장 잘 담긴 작품 중 하나는 ‘황혼’이다. 6장 분량의 짧은 이 소설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마음 둘 곳 없는 46세 중년 여성의 쓸쓸한 심리를 그린다. 주인공은 ‘책을 좋아하고 골프를 쳤으며 폭풍우를 헤치며 살아온 멋진 여자’지만 동시에 ‘지금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여자’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주택 수리공이 전 부인과 재결합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수리공이 무심하게 집을 떠난 뒤 “(그를 향한 마음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자위와 “애원했어야 한다”는 절실함이 뒤엉킨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차갑게 응시하는 그의 처연한 외로움을, 설터는 세심하지만 차갑게 그려낸다.

또 다른 작품인 ‘20분’은 주인공이 죽기 직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뜻한다. 말을 타다 사고를 당한 뒤 죽음이 닥쳐오고 있음을 예감한 그는 죽기 전 20분간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그를 지나간, 그러나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 남자들과 외도한 남편. 결코 ‘행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그때 그는 아버지가 남긴 문장을 생각한다. “삶은 우릴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

죽기 직전임을 알고 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 애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책의 서문을 쓴 작가 필립 구레비치는 “설터의 작중 인물과 그 인물들이 사는 세상은 빈번히 훼손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영웅적 행위를 믿는 작가”라고 말했다. 우리 인생에 켜켜이 쌓아올려진 외로움과 고독, 위선적인 행동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설터가 지칭하는 ‘영웅’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89년 미국의 대표적 문학상인 펜포크너상을 받았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