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김과장’의 한 장면. 편의점이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KBS 드라마 ‘김과장’의 한 장면. 편의점이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내 몸 대부분이 이 편의점 식료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잡화 선반이나 커피머신과 마찬가지로 이 가게(편의점)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지난해 11월 번역 출간된 일본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소설은 지난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실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인 작가가 편의점을 소재로 쓴 글이 일본 순수문학계 최고의 영예를 차지해 화제가 됐다.

편의점이 식당과 카페, 간의 회의실, 세탁 서비스 등을 갖춘 복합 편의공간으로 진화하면서 책과 드라마 등 문화 콘텐츠에서도 편의점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 늘었다. 단지 배경으로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콘텐츠의 주요 소재로 쓰이는 경우도 많아졌다. 1인 가구 위주의 젊은 세대가 편의점을 많이 찾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로

최근 드라마에선 편의점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레스토랑 데이트 대신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함께 먹거나 (tvN ‘도깨비’), 업무 스트레스를 ‘소폭’(소주+맥주)으로 풀고(KBS ‘아버지가 이상해’), 출퇴근 전후 군것질거리로 ‘1+1’상품을 사는(KBS ‘김과장’) 식이다. 한 방송사 PD는 “1990년대 드라마에서는 편의점이 ‘쿨한’ 도시 신세대 주인공의 서구화된 소비생활을 보여주는 장소였는데 요즘은 평범한 20~30대의 삶의 공간”이라며 “혼밥·혼술 트렌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 자주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편의점이 프로그램의 주요 소재로 전면에 등장한 프로그램도 나왔다. 케이블채널 tvN의 ‘편의점을 털어라’는 편의점에서 파는 제품을 섞어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쿡방’이다. 지난 1월 4부 파일럿 방송을 내보낸 이후 정규편성이 확정돼 13일부터 방영됐다. 감자과자에 치즈를 올린 ‘오!치즈프라이’, 인스턴트 면 요리에 떡볶이와 치즈 등을 섞은 ‘마크 정식’ 등이 이 방송을 통해 유명해졌다.

편의점 즉석식품과 과자를 사용하는 요리법은 1인방송 크리에이터에게도 단골 소재다. 이런 요리법만 모은 책도 나왔다. 1월 말엔 《편한식사-편의점 재료로 만드는 한 끼 식사》가, 지난달 말엔 《편의점을 털어 만든 집밥 한 끼》가 출간됐다.

◆편의점 다룬 소설·시집·에세이집 ‘봇물’

책·드라마·예능 속으로… 편의점 콘텐츠가 되다
편의점을 소재로 한 소설, 에세이 등도 잇달아 나오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정영희 시인의 시집 《아침햇빛편의점》, 박영란의 장편소설 《편의점 가는 기분》 《편의점 인간》이 출간됐다. 저자가 제주도의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을 풀어낸 에세이집 《달밤의 제주는 즐거워》는 2015년 출간 이후 지난해 12월 개정판을 출간했다.

혼자 오는 손님이 많은 편의점에는 대도시의 익명성과 공동체성이 혼재한다. 문학작품들은 편의점의 이런 특성에 착안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청소년 성장소설인 《편의점 가는 기분》의 주인공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자퇴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는 편의점에 들어오는 손님들을 유심히 보면서 사람마다 갖가지 사연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을 깨닫고 바깥 세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은 냉소적인 관찰자다. 어린 시절 언행이 독특했던 주인공은 부모님의 걱정을 들은 뒤 말수를 줄이고 매사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가 18년째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모든 것이 매뉴얼대로 정리된 편의점에선 ‘보통 인간’을 연기하며 세상의 톱니바퀴로 살 수 있다는 것. 주인공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할 때도 “깔보는 표정을 보는 게 몹시 흥미롭다. ‘저게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편의점이 콘텐츠 트렌드로 떠오른 것은 1인 가구로 바쁘게 지내는 현대인의 삶을 반영한 결과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심영섭 문화평론가는 “편의점은 홀로 간편하게 편리를 느낄 수 있는, 시장이나 마트보다도 목적성이 강한 공간”이라며 “원자화된 사람들이 원할 때마다 즉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장소여서 요즘 콘텐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편의점 요리법의 유행도 그렇다. 심 평론가는 “완벽히 고급 요리를 만들 수는 없지만 흉내는 낼 수 있게 된 것”이라며 “시간과 에너지, 돈이 부족하지만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의 징후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