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안티고네’. 국립극단 제공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안티고네’. 국립극단 제공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국립극단 제작, 한태숙 연출의 연극 ‘안티고네’는 올 상반기 연극계 최대 관심작이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남긴 ‘불멸의 고전’인 데다 2년 전 같은 극단과 연출가가 무대에 올려 큰 호응을 이끌어낸 ‘오이디푸스’의 후속작 성격도 띠고 있어 더 기대를 모았다. 신구 박정자 김호정 등 명배우들의 출연 소식도 연극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연극 공연으로는 드물게 지난 15일 시작돼 오는 28일까지 진행되는 전회 공연의 관람권이 일찌감치 매진된 것은 이런 관심의 반영이다.

공연은 도입 장면부터 강렬하다. 평면이 아닌 경사진 무대에서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조명 아래 가슴을 울리는 거문고 독주에 맞춰 경련을 일으킨 듯 몸부림치는 군무로 시작된다. 군무가 끝날 무렵 처참하게 훼손된 시체 한 구가 경사면을 따라 굴러떨어진다.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의 패권을 놓고 싸우다 서로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채로 죽은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중 반역자 폴리니케스의 시신이다.

극은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폴리니케스의 여동생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등장하며 원작의 흐름을 따라간다. 반역자에 대한 본보기로 폴리니케스 시체의 매장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 새로운 테베의 통치자 크레온과 왕의 칙령을 거부하고 ‘신의 법’에 따라 사랑하는 오빠의 시신을 묻으려는 안티고네가 팽팽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현대적인 극 환경에 맞춰 각색된 부분도 많다. 코러스 역할을 맡는 테베 원로들은 전쟁과 신의 재앙으로 고통받는 시민들로 대체된다. 심약한 현실주의자인 이스메네의 비중이 커지고, 크레온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제란 인물이 새로 창조됐다. 다소 단조로웠던 캐릭터 구성이 보다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극을 지배하는 것은 강렬한 시청각 이미지다. 우울하고 기괴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상징적이고 입체적인 무대미술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음악, 음산한 까마귀 소리와 빗소리, 시민들의 고통과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형상화한 격렬한 춤 등이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후반부에 경사진 무대가 날카롭게 반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안티고네가 자결하는 순간 무대 뒤에서 목을 맨 시체가 흔들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안티고네’가 현대적인 감각과 연출 기법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표현 양식의 강렬함에 눌려서일까. ‘배우의 예술’인 연극에서 배우들의 힘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극을 이끄는 신구(크레온)와 김호정(안티고네)은 ‘열연’하지만 ‘명연’을 펼치지는 못했다. 신구는 크레온의 정치적인 논리와 정당성을 힘 있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했다. 극이 원작에 비해 크레온을 다분히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신의 뜻을 무시한 독재자’로 몰고간 탓도 있다.

김호정도 다부지고 섬세하게 연기하지만 안티고네에 기대했던 흡인력과 폭발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배우의 힘만으로 무대를 휘어잡은 것은 예언자 티레시아스 역을 맡은 박정자였다. 두 장면만 등장하는데도 예언자의 캐릭터를 창의적인 몸짓과 발성으로 연기하며 강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