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12) 진섭(陳涉)‥머슴에서 왕으로…사람을 믿지 못해 6개월만에 망하다
중국의 제후 왕 가운데 후손을 두지 못한 자가 있다. 바로 진섭이다. 그를 위해 고조 유방은 그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두게 하고 틈이 나면 제사도 지내 주는 등 자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진섭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이뿐이랴. 사마천도 반란을 통해 왕이 된 진섭을 제후 왕의 영역인 '세가'에 편입,역사관의 객관성과 서술의 편파성 문제에 대한 오해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진섭세가》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진승(陳勝)이며, 양성(陽城) 사람이고, 자(字)는 섭(涉)이다. 진섭이 젊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밭갈이하는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밭갈이를 멈추고 밭두렁에서 쉬며 자신의 신분을 한참 동안 한탄하다 다른 머슴들에게 말했다. "부귀하게 된다면 서로 잊지 말기로 하지." 그러자 머슴들은 비웃으면서 "너는 고용 당해 밭갈이를 하는데 무슨 부귀란 말인가?"라고 놀렸다.

이 말을 들은 진섭은 "아! 제비와 참새가 어찌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라고 한탄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결국 진시황의 뒤를 이은 진 2세가 정권을 잡으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넓힌다는 뜻의 장초(張楚)를 국호로 삼아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진섭이 왕이 되고 난 뒤 어느 날, 그와 함께 머슴일을 하던 옛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가 막무가내로 궁궐 문을 두드리며 "나는 진섭을 만나려 한다"고 말하자 영문을 모르는 궁궐 문지기가 그를 포박하려고 했다. 그가 여러 차례 자신이 진섭의 친구라고 해명하자 풀어주고 보고는 하지 않았다. 진섭이 호화스런 행차를 하며 궁문을 나섰을 때 그가 길을 막고 큰 소리로 진섭의 이름을 불러댔다.

진섭은 반가운 마음에 그와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오게 됐다. 궁궐 문에 들어서는데 궁전에 드리운 휘장을 보자 그 친구가 "대단히 화려하구나! 진섭이 왕이 되니 궁전이 높고 깊구나!"고 말하면서 방자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떠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옛날 날품팔이 시절의 일도 떠들어댔다. 그 친구는 이미 왕이 되어 주위에 신하들이 진섭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진섭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떠들어대는 친구가 내심 야속했다. 자신은 이미 왕이 됐는데 그 친구는 옛날로 돌아가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최측근들이 진왕에게 다가와 "친구 분이 우매하고 무식하며,멋대로 망언을 일삼으니 왕의 위엄을 깎아내리게 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진섭은 자신의 과거가 친구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지게 되면 위엄을 세우기도 어렵다고 판단해 그 친구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런 소문은 빨리 퍼져나가게 마련이다. 진섭의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외로움에 빠진 진섭은 판단력이 흐려지게 됐고,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진섭은 주방(朱房)을 중정관(中正官)으로 삼아 인사를 관장하게 했고,호무(胡武)를 신하들의 과실을 감찰하는 사과관(司過官)으로 삼아 감시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을 공략하고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주방과 호무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붙잡아 죄를 묻기도 하고,가혹하게 감찰하면서 진섭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이 두 사람과 좋지 않은 사이거나 아래에서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자료를 주지 않으면 모두 이들이 엄히 다스렸다. 진섭은 이 두 사람만 신임했다. 여러 장수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왕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으며, 저마다 불평과 불만을 마음 속에 담아두게 됐다. 6개월 뒤에는 진섭이 봉하고 파견한 자들이 결국 모반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망하고 말았다.

권력자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이미 움터 있을 오만의 싹이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