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대야로 거울 삼고/ 맹물로 기름삼아 머리를 빗네/ 첩의 몸이 직녀 아닐진대/ 낭군이 어찌 견우이리까. '

조선 여성 시인 이옥봉의 <위인송원(爲人訟寃)>이라는 시입니다.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양반의 서녀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성년이 되어서 조원이란 선비를 흠모해 그의 첩을 자청했는데,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절대 시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했지요. 그녀는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 하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동네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파주 목사에게 손을 좀 써 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아전들의 장난질이 분명했지요. 이 때 옥봉이 파주 목사에게 써 보낸 게 바로 이 시입니다. 직녀와 견우를 빗댄 표현이 절묘하지요.

사실 이 부분은 이태백의 시구를 변형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이태백이 소를 몰고 현령이 있는 곳을 지나다가 현령의 부인에게 지청구를 듣자 "그대 직녀가 아닐진대 어찌 견우에게 물으시오?"라고 대답했지요. 이백이나 옥봉이나 참으로 시적 역설의 대가들이었군요. 그러나 옥봉은 이 일로 조원에게 쫓겨나고 맙니다.

그녀의 일생과 시문을 담은 《이옥봉의 몽혼》(하응백 편저)과 조두진씨의 장편소설 《몽혼》(휴먼앤북스 펴냄)이 나란히 출간됐습니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씨가 조원의 문집 《가림세고》의 부록에 담긴 이옥봉 시와 흩어져 전해오던 작품 33편을 찾아내 묶었고,작가 조두진씨는 옥봉의 파란만장한 삶을 맛깔스런 소설로 풀어냈군요.

허난설헌이나 황진이에 비해 덜 알려진 400여년 전 천재 여성시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달 비친 사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는 절창을 음미하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시 때문에 사랑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 시는 현대적 감성으로 읽어도 절절한 연애시이며,서도민요 명창들이 애창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문화부 차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