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서울의 한 동네를 산책하고 있던 32세 남자.그 앞에 정체불명의 재앙이 나타났다. 2m 높이의 둥그런 그림자처럼 보이는 '검은 구'가 느닷없이 등장해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게걸스럽게 흡수해버리는 구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아무리 도망쳐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사람들을 지배한다.

상금 1억원으로 화제를 모은 '멀티문학상' 제1회 수상작인 《절망의 구》(예담 펴냄)는 가혹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재난영화의 얼개를 갖췄지만,재난영화의 상투적인 미덕은 도통 보이질 않는다. 간간히 인간애를 발휘해가며 재앙에 용감하게 맞서는 소시민도 없고,생존자들이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나누는 결말도 용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한 상황에서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인간의 추하고 불쾌한 '밑바닥'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정체불명의 검은 구가 천천히,끈질기게 따라오는 악몽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는 작가 김이환씨(31 · 사진)는 "이해할 수도 이길 수도 없는 '검은 구'라는 부조리 앞에서 폭발하는 인간의 공포와 불안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소설을 쓰는 동안 사람들이 정치적,경제적,감정적으로 불안에 시달린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소설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공포가 무엇인지 고민해 온 결과물"이라고 덧붙였다.

소문만 무성할 뿐 검은 구의 정체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기에 공포와 불안은 더 커져간다. 사람들의 행태도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다. 검은 구가 사람을 한 명 흡수하면 몇시간 동안 다른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헛소문을 믿은 악당들은 타인을 미끼로 쓰며 시간을 벌려고 한다. 검은 구를 처음으로 목격한 주인공 남자는 생존본능의 노예가 되어 신고도 하지 않고 줄행랑부터 친다. 검은 구를 멈추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들이 애타게 도움을 요청해도 공포심에 휩싸인 남자는 외면해버린다.

도피행각 중 남자는 자신이 구에 흡수되지 않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남자의 이런 '행운'을 곧바로 또다른 시련의 계기로 반전시켜 버린다. "검은 구의 비현실적 공포에서 벗어난 순간 현실적 공포가 덮쳐오는 극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죠."

《절망의 구》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실 남자보다는 검은 구일지도 모른다. 달리면 피할 수 있을 듯 느릿한 속도지만 끈기있게 사냥감을 찾아다니다 급기야 하나 남은 먹잇감 주변에 모여들어 때를 기다리는 검은 구가 천천히 독자를 옥죄어 온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