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정끝별(41) 명지대 국문학과 교수가 신작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을 냈다. '흰 책' 이후 5년 만에 내는 세 번째 시집이다. 수록시들에서는 사막처럼 메마르고 팍팍한 세상에서 허기와 목마름으로 어지럼증을 느끼는 여린 영혼의 신음같은 애처로움이 묻어난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찌든 모습을 희미하게 지워버려 언뜻 정겹고 평화롭게 보이는, 그래서 깊게 빠져들지 않으면 진경에 도달할 수 없는 박수근의 그림처럼 수록시들은 궁벽한 생의 조건에서 모진 생명의 의지를 은근하게 드러내 보인다. 시인은 "그 나무에 꽃 없다/피우지 못하고 꺾어버렸다/가슴에 더 할 말 없다고/사랑에게 뻗어 가는 어깨 잘라버렸다/마음 다 펼칠 수 없다고/(중략)/그 나무에 숨 없다/뿌리처럼 비틀린/빈 목숨만이 붙어/옆얼굴이 울고 있다"('허공의 나무' 중)며 생명의 가지를 뚝뚝 잘라버리고 사랑없는 세계에 갇히는 지식인의 가난한 영혼을 박수근의 그림에 빗대어 묘사한다.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찌개 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밥이 쓰다/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목메인 밥을 쓴다"('밥이 쓰다' 중)는 시에 이르면 '쓰는 행위'와 '삶의 쓴맛'사이에서 빚어지는 고통이 혀끝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와닿는다. 그러나 "제 몸 깊이/길의 상처를 받아내며 굴러 간다/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둥근 힘/돌아갈 길이 멀수록/더 빈 바람으로 제 속을 채운/한 떼의 검은 타이어들이/한나절의 피크닉을 끌고 간다"('검은 타이어가 굴러 간다' 중)는 시편을 통해 시인은 지상의 삶에서 생겨난 마찰을 우주의 '둥근 힘'으로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108쪽. 7천원.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ckch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