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원로작가인 윤형근 화백(75)은 "내 작품은 그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냥 화풀이 작업으로 이해해 달라"는 게 윤 화백의 설명이다. 갈수록 척박해져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지만 윤 화백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그림에는 말이 필요 없고 보고 느끼면 된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다. 17일부터 서울 청담동 박여숙화랑에서 개인전을 갖는 그는 30년 이상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갈색 & 감청색·사진)'란 작품 제목을 고집하고 있다. 이 긴 제목은 작가가 물감들을 합쳐 개발한 갈색 또는 감청색의 단색을 의미한다.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 위에 갈색 또는 감청색으로 사각형의 면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한폭의 추상적인 수묵화의 느낌을 준다. 사실 그의 그림은 어떠한 장식적인 현란함과 기교도 볼 수 없다. 화면 안의 색면은 언뜻 보면 그저 하나로 뭉그러진 검은 덩어리로 보이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 아래서부터 서서히 스며 올라오는 다른 색들이 보인다. 절제와 '여백의 미'를 추구한 흔적이 있지만 일본 평론가 아즈마 토로우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고자 하는 풍부한 무(無)"라고 평한다. '우주의 풍경' 같기도 하고 작가의 심성을 반영한 것 같기도 하다. 관람객이 직관적으로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1947년 서울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데모에 가담한 이유로 제적당한 후 50년대에 홍익대로 편입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서세옥 문학진이 대학 동기이며 수화(樹話) 김환기의 사위이기도 하다. 12월2일까지.(02)549-7574 이성구 미술전문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