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직접 압박을 가해오지만(며칠 쫄쫄 굶거나 칼에 손을 베는 그 생생한 고통을 상상해보라) 문학의 세계는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현실과 거리를 둔 언어 저편의 세계다. 마르쿠제는 "미적 차원"에서 "아우슈비츠와 미라이촌,고문,기아,죽음-이런 세계가 "단순한 환상"이나 "지독한 기만"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그것은 "지독하고" 상상을 넘어서는 현실이다.예술은 이 현실로부터 움츠러든다"고 말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현실로부터 비켜나 있는 상상의 세계,비현실의 세계,허구의 세계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창조된 상상이며,비현실이고,허구의 세계인 문학은 그 안에 일상적 현실보다 더 많은 진리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허위와 기만성을 낱낱이 까발리곤 한다. 김현은 불문학자로서 '바슐라르 연구'(곽광수와 공저,1976) '현대 비평의 혁명'(1977) '문학 사회학'(1980)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1989) '시칠리아의 암소'(1990) 등을 펴낸다. 그는 자신이 연구한 프랑스 문학을 한국 문학의 화법으로 녹여내고 그러면서도 편협한 주관성을 벗고 세계사적인 눈으로 한국 문학을 조망한다. 그에게 외국 문학은 좀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으로 우리 문학을 읽어내고 거기서 의미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 문학 속에서 숙성되고 있는 보편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외국 문학에 대한 우리의 근거 없는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떨쳐내게 만들며,나아가 오히려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길어올린다. 김현은 문학의 도구인 언어의 문제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해 구두점 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평론가이며 스스로 '한글주의자'라고 칭한다. 그의 '한글주의'는 단순히 한자어를 모조리 한글로 바꾸는 편협한 한글 국수주의가 아니라 되도록이면 한글로 쓰되 그 한글의 속을 생각의 겹으로 채우는 의미론적 깊이로 나타난다. 이런 김현의 비평 문체는 '김현체'라고도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데 비평의 대상이 된 작가들이 즐겨 읽을 만큼 독자를 매혹한다. 언어에 민감하다는 것 외에 텍스트들의 상호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 또한 김현 비평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은 당대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서는 드물게 한 번도 역사의 객관적 법칙과 이에 따른 전망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다. 그는 과격한 개혁주의를 민중적 전망주의로,부르주아 개량주의는 문화적 초월주의로 파악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태의 중심부에서 언제나 비켜나 있다는 비난도 받는다. 그는 특히 작품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실제 비평에 뛰어난 면모를 보이며 이는 곧 그가 참여한 '문학과 지성'의 강점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프로이트와 융과 사르트르에서 시작한 김현의 서구 사상 편력은 바슐라르와 알튀세르와 지라르를 거쳐 푸코로 마감된다. 이런 궤적은 상상력 이론과 문화사회학,주제 구성과 구조 분석등을 낳는 토대가 되고 그의 비평적 지평을 넓히는 데 이바지한다. 김윤식과 함께 '한국 문학사'(1973)를 선보이고 한국 문학의 전개와 좌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 문학의 위상'(1977)을 내놓은 김현은 '상상력과 인간'(1973) '분석과 해석'(1988) 등의 평론집을 펴낸다. 김현은 90년 6월 27일 새벽 2시 50분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뜬다. 그가 죽은 뒤에도 '분석과 해석' 이후의 평론을 모은 '말들의 풍경'(1990),유고 일기 '행복한 책 읽기'(1992) 등이 나온다. 91년부터 '문학과지성사'에서 전 16권의 '김현 문학 전집'이 발간되어 93년에 이르러 완간된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