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문을 열자 한지 특유의 냄새가 진동한다. 유화 냄새와는 달리 은은하면서 상큼하다. 서울 홍익대 부근에 있는 한지작가 함섭(59)의 작업실. 그는 요즘 무더위도 잊은 채 하루 9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오는 9월7일부터 서울 청담동 박영덕화랑에서 갖는 개인전이 임박해서다. 2년 만에 갖는 전시회에서 '데이 드림(Day Dream)'을 주제로 1백호 이상의 대작 30여점을 선보인다. 그는 한지의 물성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개척해 온 중견작가다. 한지를 소재로 하는 작가는 수없이 많지만 함씨 만큼 한지의 속성을 완전히 파악해 다루는 작가는 드물다. 함씨는 한지를 단순히 조형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지 자체에 예술적 영감을 부여한다. 그는 우선 한지를 찢고 파괴한 후 물에 불린다. 덩어리가 된 한지를 말린 다음 그 위에 전통한지를 다시 씌우고 솔로 두들겨 하나의 판(화면)을 완성한다. 한지 바탕에 고서(古書)조각과 닥종이 원료를 가미한 그의 화면은 바탕에서 뿜어 나오는 중후한 황토빛과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두터운 질감으로 인해 다른 작가의 한지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한지의 특성을 극복해 새로운 재질감으로 재형성시켰기 때문이다. 한지를 다룬 30여년의 세월이 말해주듯 그는 '한지의 달인'경지에 올라있는 셈이다. "한지를 오래 하다보면 유화나 다른 재료는 만지질 못합니다. 그만큼 매력이 강합니다" 함씨는 "작가가 어떤 감성으로 한지를 다루느냐에 따라 작품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변화가 무한하다"며 "조각가들에게 한지를 재료로 쓰라고 추천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나 "한지가 한지이기를 거부(다른 재질감으로 재탄생시킨다는 의미)했을 때 한지 다루는 데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며 한지를 숙달되게 다루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아직 국내에서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화상이나 컬렉터들이 '종이뙈기'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해외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는 해외 아트페어에서 가장 인기높은 국내 작가 중 한 명이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바젤 쾰른 등 해외의 굵직굵직한 아트페어에서 지난 96년부터 팔린 작품만 2백50여점에 달한다. 2백여점이 넘었다는 점에서 '미술관 작가'로 분류되는 위치에 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을 작품들은 색감이 강하다. 최근 몇 년간 은은하던 화면에 다시 색채를 가미했다. 그는 'ㄱ'자형 한옥구조 마당에 평상을 펼친 형상을 제작한 최근작을 보여주며 "화면의 색감은 계절 바뀌듯이 무의식적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물감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한 해 1백점이 넘는 작품을 조수없이 혼자 제작하는 그를 볼 때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정설이 새삼 떠오른다. 오는 9월 국내 개인전이 끝나면 11월에 네덜란드 코바랭크화랑에서의 개인전,내년 상반기에 스위스 갤러리 골드텀에서의 개인전이 각각 예정돼 있다.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