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년 가장이 가출했다.

사춘기 청소년도 아닌 40대 남자가 집을 나가다니.

그것도 아이의 담임선생님에게 갈 촌지봉투를 훔쳐 개와 함께 "탈출"해
버렸다.

평생 등이 휘도록 일한 그를 집에서 몰아낸 것은 아내와 아이들이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쥐꼬리 월급쟁이인 그를 식구들은 더이상 존경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40대 가장을 옴쭉달싹 못하게 만드는 우리사회의
구조다.

사회의 부패고리 때문에 가장의 권위를 잃어버린 그가 부패의 상징인
촌지를 훔쳐 도망친 것은 아이러니다.

소설가 김문수(58)씨의 중단편집 "가출" (답게 간)에는 남편과 아버지,
사회인으로서 벼랑끝에 몰린 한 중년남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표제작인 중편 "가출"의 주인공은 일요일 새벽 자신의 애견 "황군"을
데리고 집을 떠난다.

"황군"이라는 이름은 황견계약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쟁의행위에도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맺는 고용계약)에 대한 반발로 그가 개를
의인화해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입사때 쓴 서약서 때문에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노조원들로부터 황견족이나 똥개패로 불린다.

그렇다고 사용자에게 큰 혜택을 받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나마 제때 월급을 받는 것에 감사해하는 소시민이다.

말하자면 사용자와 노조원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더구나 그는 월급을 한번도 직접 만져보지 못했다.

"온라인통장이라는 게 생겼고 봉급은 아내의 통장으로 전액 입금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는 내 봉급의 전액이 온 것이어서 "온라인"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봉급이 몽땅 아내에게 갔으니 "간라인"이래야 옳다"

술값으로 지갑을 털린 뒤론 담배와 토큰 공중전화카드까지 아내에게
"배급" 받으며 산다.

그러다보니 잠자리에서도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제는 아내와 눈길만
마주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불쌍한 남자가 돼버렸다.

집을 나온 그는 모처럼 안주머니에 현금을 두둑히 지니고 있어 야릇한
만족을 느낀다.

그러다가 "황군"이 발정난 암캐와 교미하는 바람에 알게 된 분식집
여자와 "용감한 성행위"를 갖는다.

이 반전을 통해 그는 남성성을 회복하고 앞으로의 삶을 "과감하게"
설계할 힘을 얻는다.

함께 실린 7편의 단편도 우리사회의 부패구조와 소외된 인간성을 잘
드러내준다.

며느리의 구박에 못이긴 노인들이 며느리가 아끼는 개를 훔쳐내 보신탕을
해먹은 뒤 가출하는 내용의 "살아나는 시신들", 성수대교 붕괴때 희생된
가장의 얘기인 "파문을 일으킨 모래알", 부정축재자가 우여곡절끝에
뇌물을 바칠 수밖에 없는 과정을 다룬 "족보있는 개" 등에는 좌표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우울한 모습이 농축돼 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