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김춘수씨(75)가 신작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와 자전소설
"꽃과 여우"를 한꺼번에 출간했다. (민음사 간)

시집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등장인물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번쯤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감동의 보고.젊은 시절 한때만이 아니라 일흔이 넘도록
도스토예프스키를 되풀이 읽어온 시인의 화두가 시집에 담겨 있다.

김씨는 초창기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삶의 비극적인 상황과 존재론적
고독을 탐구했고 60년대말부터는 "무의미시"를 주창하면서 고유의
시세계를 구축해온 "인식의 시인".

그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존재양식이 비극적이라는 것을 여실히
그려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했다며 "그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과제였고 화두였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1,2부에는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냐에게"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의 노래 "아료사에게"
등 38편이 실려있다.

3부 "스타브로긴의 뇜"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악령"에 들어있는
스타브로킨백작의 고백을 시로 정리한 것.

4부 "대심문관"은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가운데 한 장을 극화한
시편들이다.

자전소설 "꽃과 여우"에는 유년시절 형이상학적 질문에 처음 맞닥뜨렸던
기억에서부터 고교시절을 거쳐 대학 재학중 일본의 한 헌책방에서 접한
릴케의 시에 운명적으로 이끌렸던 일등이 찬찬하게 기록돼 있다.

그런가하면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박재성 서성탄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펼치게 된 동기도 담겨있어 그의 문학적
발자취를 한눈에 읽을수 있도록 했다.

김씨는 통영문화협회 시절 문인들로 극단을 만들어 순회공연차 마산으로
가던 중 주역배우가 없어져버린 일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주역배우를 잃은 채 대역들만이 천방지축 까불랑거리는 꼴이라고"

이 소설은 50년까지만 다루고 있는데 그는 "내 생애 후반기에는
60년대초의 정치 관여라는 꽤 까다로운 문제가 낀다"며 "이 문제를 내
스스로 해명하려면 좀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밖에서는 내 정치 관여를 도덕적 측면에서 보고 있는 듯 하나,
문제가 된다면 논리적 문제이지 도덕적 문제는 전연 아니다"라고 말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