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누이"는 서사적 구조보다 촬영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남태평양 외딴섬의 전설을 영상에 옮긴 이작품은 신화적 상상력이
현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무대는 남미의 칠레에서 3,400km 떨어진 이스터섬.

원주민들이 라파누이(Rapa Nui : 세상의 중심)라고 부르는 이 섬에는
550개의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문명세계와 단절된 이섬에서 지배계급인 큰귀부족은 "언젠가 위대한
조상이 서쪽에서 흰배를 타고와 자신들을 구원한다"는 전설을 믿고
작은귀부족에게 석상을 만들어 세우도록 한다.

절대권력의 횡포와 이에 맞서 혁명을 꿈꾸는 피지배계급의 대립이
점차 표면화되는 가운데 큰귀부족 추장의 손자인 노로(제이슨 스코트
리)와 작은귀부족 처녀 라마나(산드린 홀트)의 사랑이 영화를 이끌어
간다.

얼핏 보면 원시부족의 생존방식을 통해 권력의 이면을 다루고자 한 것
같지만 케빈 레이놀즈감독은 메시지보다 영상미의 전달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환상적이면서도 장중한 영상은 도입부와 라스트신에서 극치를 이룬다.

카메라가 망망대해를 훑고 지나가는 첫장면은 강한 흡인력을 지닌다.

점층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의 섬.빛의 이동을 통한 암각화의
명암대비는 특히 인상적이다.

큰귀부족추장이 흰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과정은 감독의
의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시키는 대목.흰배는 다름아닌 빙산조각.

전혀 현실성이 없어뵈는 이 설정이 신화적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추장후계자인 노로가 라마나와 새생명을 데리고 섬을 등지는
결말부분에 와서 이 장치는 헐거워져 버린다.

신화를 지탱해오던 상징의 기호가 단순한 메시지의 의미망에 갇혀
버린 까닭이다.

(15일 피카소 국도 영화나라 개봉)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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