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머니'를 앞세운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PIF(Public Investment Fund)가 연일 국내 게임사 주식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 지난해 신작 부재와 인건비 상승, 확률형 아이템 논란 등 연이은 악재로 몸살을 앓은 국내 게임업계는 PIF의 대대적 투자에 한껏 고무된 상황. 게임 산업의 미래 가치 인정과 주가 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만큼 게임 업계는 이 여세를 몰아 해외 진출을 적극 꾀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우디 국부펀드, 넥슨·엔씨소프트 주식 추가 매입

12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PIF는 엔씨소프트(이하 '엔씨') 주식 56만3566주를 약 2900억원에 추가 취득했다고 지난 1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했다. 공시에 따르면 PIF는 지난달 9일부터 16일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엔씨 지분을 장내에서 사들였다. PIF는 '단순 투자 목적'으로 지분을 매수했다고 공시에서 밝혔다. PIF는 지난달에도 엔씨 지분 6.69%(146만8845주)를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이번 추가 지분 매수로 PIF의 엔씨 지분율은 9.26%(203만2411주)로 높아지면서 김택진 대표(11.9%)에 이은 2대 주주가 됐다. 넷마블(8.9%)과 국민연금(8.4%)의 지분율을 넘어섰다.

사우디 PIF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넥슨 주식도 최근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지난 8일 일본 전자공시시스템(EDINET)에 따르면 PIF는 지난달 15일부터 이달 1일까지 넥슨 지분 1.07%를 추가 매입했다. 취득금액은 234억9161만엔(한화 약 2509억원)이다. 이로써 올 1월 1조원대 첫 지분 투자 이후 현재까지 넥슨에 대한 PIF의 누적 투자 금액은 1970억4462만엔(약 2조1068억원)으로 집계됐다.

넥슨에 대한 PIF 지분율도 6.03%에서 7.09%로 끌어올렸다. 3대 주주인 일본마스터트러스트신탁은행(8.1%)과의 지분율 차이는 단 1%포인트까지 좁혀졌다.
엔씨소프트 판교 R&D센터 사옥 전경 [사진=엔씨소프트 제공]
엔씨소프트 판교 R&D센터 사옥 전경 [사진=엔씨소프트 제공]
PIF는 국내 게임사 투자에 대해 단순 투자 목적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지분 매입 과정에서도 각 회사 경영진, 이사회와는 어떠한 사전 대화나 교류도 없던 것으로 파악된다.

게임사들 역시 경영권 확보를 위한 것이 아닌 단순 투자 목적으로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PIF가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를 한 적이 없다. 비교적 저가에 장내 매수를 진행한 점, 국제 정세로 인한 투자 시장 불확실성이 증대된 시점에 매입했다는 점 등을 볼 때 PIF 투자는 경영권이 목적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K-게임 성장성…사우디가 눈독 들이기에 충분"

PIF는 5000억 달러(한화 약 600조 원) 규모 기금을 운영 중이다. PIF를 이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는 게임산업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PIF는 지난 1월 '새비 게이밍 그룹(Savvy Gaming Group)'을 출범한 이후 전세계 게임산업을 주도하겠다는 목표 실현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실제로 PIF는 엔씨, 넥슨 외에도 다양한 글로벌 게임사에 관심을 보였다. 지난해 일본 게임 개발사 SNK의 최대 주주에 올랐으며 미국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일렉트로닉아츠(EA), 테이크 투 인터랙티브 등에도 투자했다. 최근에는 일본 캡콤 지분(5.05%)도 3억3200만 달러(약 4073억원)에 사들였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넥슨 사옥의 모습 [사진=뉴스1]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넥슨 사옥의 모습 [사진=뉴스1]
사우디 정부도 석유 에너지 사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디지털 콘텐츠 산업 육성에 공 들이고 있다. 지난달에는 게임, 오디오, 비디오, 광고 분야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디지털 콘텐츠 시장의 규모를 세 배 이상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 '이그나이트(Ignite)'를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에 11억 달러(약 1조3500억원)가 투자된다.

K-게임은 사우디가 눈독 들이기에 충분한 성장성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다. 2020년 세계 게임 시장 규모는 총 193조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한국 게임 시장 규모는 2019년 대비 21.3% 성장한 18조 8855억원을 기록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1년 국내 게임 시장 규모가 20조원을 넘어섰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20년 한국 게임산업 수출액 또한 81억 9356만 달러(약 9조6688억원)로 전년 대비 23.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IP 글로벌 확장 눈여겨봐야"

특히 인기 게임 지식재산권(IP)의 글로벌 확장을 눈여겨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넥슨의 카트라이더, 던전앤파이터 등 인기 IP는 e-스포츠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엔씨의 대표 IP 신작 '리니지W' 역시 국내를 넘어 태국, 대만 등 동남아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리니지W는 북미와 유럽, 남미 시장 진출도 계획 중이다.

엔씨와 넥슨은 자사 IP를 활용한 디지털 콘텐츠 확장 차원에서 블록체인 기반 대체불가능토큰(NFT), 메타버스 등의 분야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넥슨은 지난 1월 자사가 보유한 게임 IP의 글로벌 확장을 위해 마블 영화를 감독한 루소 형제의 제작 스튜디오에 최대 6000억원에 달하는 투자를 진행했다. 이어 올해 상반기 중 최대 1억 달러를 추가 투자할 예정이다.
엔씨소프트_글로벌 신작 리니지W 신규 광고 [사진=엔씨소프트]
엔씨소프트_글로벌 신작 리니지W 신규 광고 [사진=엔씨소프트]
넥슨 지주사인 NXC는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 코빗과 비트스탬프도 소유하고 있다. 엔씨는 올 3분기 서구권에 출시하는 '리니지W'에 NFT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다. 최근 글로벌 2000만 다운로드를 돌파한 글로벌 팬덤 플랫폼 '유니버스'를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확장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PIF는 새비 게이밍 그룹 출범을 기점으로 각국 대표 게임사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넥슨과 엔씨에 대한 투자도 그러한 방향의 일환"이라며 "기름 고갈보다도 친환경 시대로의 전환 때문에 탈(脫)석유 바람이 불고 있어 사우디뿐 아니라 상당한 오일 머니가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시장으로 유입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