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태양, 적색 초거성 베텔게우스와 블랙홀 M87(환산 크기) 지름 비교.  EHT 연구진 발표 캡처
지구와 태양, 적색 초거성 베텔게우스와 블랙홀 M87(환산 크기) 지름 비교. EHT 연구진 발표 캡처
공상과학(SF) 영화나 게임에서는 소위 ‘평행세계’란 개념이 등장한다. 같은 시간,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는 상상이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평행세계가 필연적으로 생긴다. 과거로 가서 어떤 사건을 바꿔놓으면, 그때부터는 본래 세계와 바뀐 세계 2개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평행세계 개념의 기원은 물리학적으로 보면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엄청난 중력을 갖고 있다. 우주에서 가장 빠른 존재인 빛(초속 약 30만㎞)조차 근처에 가면 왜곡되거나 소멸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어떤 물체든 주변 빛과 시공간에 영향을 미친다. 또 물체 질량(중력)이 크면 클수록 빛과 시공간이 더 많이 휘어진다. 어마어마한 중력을 가진 블랙홀에 접근하면 시공간이 완전히 뒤틀리는데, 이 순간의 경계선(면)을 ‘사건의 지평선(EH: Event Horizon)’이라고 한다. EH를 넘으면 시공간 여행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이를 묘사한 영화가 인터스텔라다.

블랙홀은 2019년 4월 인류 역사상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북·남미, 유럽 등의 과학자 200여 명이 참여한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EHT)’ 연구진이 전 세계 거대 전파망원경 8개를 연결해 블랙홀 모습을 최초로 촬영했다. 지구로부터 550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초(超)대질량 블랙홀 ‘M87’이다. 연구진은 M87 주변에서 왜곡된 빛의 조각들을 일일이 모아 950억㎞에 달하는 블랙홀의 그림자를 찾았다. EH는 380억㎞였다.

블랙홀은 항성(별)의 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생긴다는 게 정설이다. 질량이 작은 항성은 늙으면서 적색거성을 거쳐 백색왜성이 된다. 반면, 질량이 큰 항성은 적색 초거성이 됐다가 폭발(초신성)한 뒤 블랙홀 또는 중성자별이 된다.

EHT 연구진 이전엔 블랙홀 주변 항성 하나가 내뿜는 X선을 활용해 간접적으로 블랙홀의 존재를 추정했다. 블랙홀 중력과 이로 인한 마찰열로 가열된 각종 물질이 이 X선을 받아 빛나는 경우를 포착하는 것이다. 이를 ‘X선 쌍성(binary star)’ 기법이라고 한다. 심지어 우주를 떠도는 블랙홀도 적지 않은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EHT 연구진과 비슷한 글로벌 연구팀이 ‘보이지 않는 떠돌이 블랙홀’을 새로 발견했다. 허블우주망원경, 제임스웹우주망원경(JWST) 운영기관인 미국 우주망원경과학연구소(STScI)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의 연구진 57명과 함께 항성 질량을 갖는 블랙홀을 찾아내 관련 논문을 ‘천체물리학 저널’에 실을 예정이라고 최근 밝혔다.

연구팀은 허블망원경으로 6년 동안 연구한 결과 지구로부터 약 4564~5737광년 떨어진 곳에서 태양 질량의 5.8~8.4배에 달하는 블랙홀을 찾아냈다. 블랙홀 주변 왜곡된 빛 데이터를 포착하고, 이를 일반상대성이론과 합쳐 수학적으로 블랙홀을 증명하는 ‘중력 렌징’ 기법을 썼다. 이 블랙홀은 초속 45㎞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 관계자는 “이렇게 속도가 빠른 것은 초신성 폭발 당시 힘을 받아 튕겨 나왔다는 의미”라며 “X선 쌍성이 아닌 방법으로 항성 질량을 가진 블랙홀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엔 미국 하버드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연구센터·컬럼비아대·펜실베이니아주립대·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 영국 맨체스터대, 이스라엘 와이즈먼과학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