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루트 홈페이지
출처=루트 홈페이지
지난 8월말 전에 없이 희한한 NFT(대체 불가능 토큰)가 공개됐다. 프로젝트 이름이 '루트(Loot)'인 이 NFT는 검은색 배경에 게임 아이템으로 추정되는 8개의 단어만 적혀 있었다. 가령 '가방(bag) #2745' NFT엔 유령 지팡이, 셔츠, 고대의 투구, 드래곤스킨 벨트, 신발 등 8개 적혀 있다. 이런 NFT가 총 7777개 있었다.

일반인은 정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이 NFT는 그러나 출시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6일까지 약 두 달간 루트 NFT의 누적 거래액은 2억6000만 달러를 넘겼다. '가방 #2025'는 하나에 1억7800만 달러에 팔렸다.

이 NFT를 개발한 돔 호프만에 따르면 루트는 가상의 롤플레잉 게임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돔 호프만은 트위터에 인수된 비디오 앱 '바인'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게임의 아이템부터 규칙, 세계관 등을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루트 NFT를 기반으로 이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게 했다. 실제 루트 NFT를 거래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커뮤니티를 만들어 게임을 설계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NFT 업계에선 루트의 인기도 인기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에 주목하고 있다. 바로 '다수의 시장 참여자에게 힘을 주자'는 것이다.

기존의 게임은 아이템의 종류와 노출 빈도, 규칙, 세계관 등 모든 것을 개발사들이 결정하고 사용자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게임 관련 수익도 대부분 개발사에게 돌아간다. 이런 '하향식' 구조를 '상향식'으로 바꾸자는 게 루트의 지향점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게임인 만큼 개발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발사에 비싼 돈 주고 게임 아이템을 살 필요도 없다. 향후 루트 게임이 완성되면 게임에서 나오는 수익은 오롯이 프로젝트 참여자에게 돌아간다.

NFT와 NFT의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은 소수의 플랫폼 기업, 금융기관 등에 쏠린 권력의 '분산화'를 추구한다는 철학에서 탄생했다. 루트 프로젝트는 이 철학을 제대로 실현하려는 실험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NFT로 판매된 유튜브 바이럴 영상 '찰리가 또 내 손가락을 깨물었어'. 유튜브 캡처
NFT로 판매된 유튜브 바이럴 영상 '찰리가 또 내 손가락을 깨물었어'. 유튜브 캡처
비슷한 맥락에서 창작자에게 보다 많은 수익을 돌려주자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는 모토를 가진 NFT 기업 오리진 프로토콜이 이를 잘 보여준다.

NFT는 그림파일, 동영상 등 디지털 콘텐츠에 고유한 인식값을 부여해 '원본'을 지정한 것을 말한다. 무한 복제가 가능해 가치를 매기기 어려웠던 디지털 콘텐츠에 희소성 있는 가치가 생겨 거래를 할 수 있게 됐다. NFT가 처음 나왔을 때 일반인도 좋은 콘텐츠를 만들면 NFT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NFT 업계에서 주로 거래되는 건 이미 유명한 스타 관련 콘텐츠나 NFT 개발사가 만든 상품이 대부분이다. 오리진 프로토콜은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이 기업은 유명인과도 협업을 하긴 하나 유망 디지털 아티스트와 유튜브 크리에이터 등을 발굴하는 데 힘쓴다. 하워드 데이비스-카 라는 일반인이 자녀들이 노는 모습을 찍은 '찰리가 또 내 손가락을 깨물었어'라는 유튜브 영상을 NFT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NFT는 76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9억원에 판매됐다. 오리진 프로토콜은 지난 11일 유튜브에서 재미있다고 입소문을 탄 28개 영상을 추가로 발굴해 NFT 경매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오리진 프로토콜의 NFT 플랫폼 '오리진 스토리'는 기존 플랫폼과 달리 창작자가 플랫폼 허가 없이 NFT를 출시, 판매할 수 있다. 원하는 창작자에겐 그 사람만의 NFT 판매 사이트를 열어준다. 판매 수수료도 다른 플랫폼 대비 저렴하다.

아티스트·창작자와 그 팬만을 위한 전용 암호화폐인 '소셜토큰'이란 개념도 등장했다. 특정 아티스트의 소셜토큰을 사면 아티스트와 따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등 이벤트 참여권, 아티스트 관련 NFT 제공, 각종 굿즈 할인 기회 등 혜택이 주어진다. 토큰을 보유한 팬은 이 토큰의 가치가 오르면 그에 따른 투자 이익도 기대할 수 있다.

소셜토큰 역시 오리진 프로토콜, 루트 등과 비슷한 문제 의식에서 나왔다. 아티스트와 관련된 부가가치와 이익의 상당 부분을 기획사나 플랫폼 기업이 가져가는 것을 막고, 팬덤 참여자들에게 보다 많은 보상을 주자는 목표를 가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소셜토큰으로는 랠리, 롤 등이 있다. 랠리와 롤은 최근 각각 5700만 달러, 1000만 달러의 투자 유치를 받기도 했다.

NFT 업계 관계자는 "일부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날 수도 있겠으나 다수의 시장 참여자, 창작자가 주도하는 NFT 생태계를 만들자는 움직임은 갈수록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