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소리가 들린다면, 말을 떠올려야지, 얼룩말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1948년 노벨상 후보자이기도 했던, 볼티모어 메릴랜드대 시어도어 우드워드 박사의 이 격언은 1960~1970년대 미국 의과대학 학생들에게 교육되고 회자됐던 원칙으로도 알려져 있다.
환자의 복잡한 임상증상을 관찰해 병명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주 드물고 희귀한 가능성을 가정하기보다는 주어진 증상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진단을 찾아 치료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14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오컴의 면도날’ 역시 비슷한 맥락에 닿아 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잘라내 버려야’ 하며,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 이상의 가설,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2021년, 희귀질환 분야에서 이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질환의 진단과 환자 예후 사이의 인과관계, 그리고 치료
대부분의 경우 환자에 대한 올바른 치료전략의 결정이나, 좋은 예후를 위해서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정확한 진단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진단의 임상적 유효성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치료제가 없는 희귀질환의 경우에는 이러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보고에 따라 다르지만, 5000여 종에서 8000여 종의 희귀질환이 있을 것으로 보고되며, 이 중 95%는 아직 치료제가 없다.

치료제가 없다면, 진단을 하더라도 시도할 수 있는 근치적 접근이 없으므로 환자의 예후가 크게 달라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제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질환의 진단과 환자의 예후 사이를 인과관계로 엮어준다. 치료제 자체의 임상적 유효성은 물론, 희귀한 환자들을 찾아내기 위한 진단 절차의 임상적 유효성을 함께 고민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희귀질환 치료제 등장의 의미
특히 대부분 희귀질환의 경우, 초기에 치료를 시작할수록 환자의 예후가 좋다는 것이 알려져 있는 만큼, 치료제의 등장으로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환자들을 늦지 않게 진단해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치료제의 등장은 어떠한 환자군을 대상으로 선별검사를 할 것인지, 최적의 진단 알고리즘은 무엇인지, 최적의 바이오 마커 선정과 진단방법·시기 등의 결정, 어떠한 진단기술을 쓸 것인지, 어떠한 진단기술이 필요한지, 진단에 대한 가용한 사회적·정책적 지원은 무엇이 있는지 등 많은 질문이 따른다.

무수히 많은 질문과 어젠다를 던짐으로써 해당 분야의 기술을 폭발적으로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곧 얼룩말 찾기 과정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치료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발굽 소리 만으로도 얼룩말을 의심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를 가지고 있고, 정보들의 임상적 의미를 이해해가려는 시대이니, 우드워드 박사의 격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겠다.

또 희귀질환 진단의 시작이 의사의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보면, 치료제의 등장은 말발굽 소리에도 얼룩말을 의심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희귀질환의 치료제가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의료진이 더 많이 의심할 수 있도록 질환 인지도를 높여야 하고, 임상정보와 근거들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 높은 수준의 정보교류 활동과 면밀한 과학적 연구들도 필요해질 것이다.

희귀질환 환자들의 삼중고
의료진이 우드워드 박사의 믿음을 여전히 따르고 있었다면 오늘날에도 희귀질환 환자들이 겪는 진단, 치료, 급여에 이르는 삼중고에 대한 고민들을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1983년 미국에서 희귀질환법이 발효돼 희귀질환 치료제 연구와 개발에 대한 인센티브가 주어지기 전까지 희귀질환 분야는 헬스케어 시장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하지만 1983년 희귀질환법 발효 이후,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500여 종의 치료제가 개발됐다고 보고된다. 한국에서도 2015년 희귀질환 관리법이 제정되고, 체계적인 제도적 지원이 이어지면서 많은 기업이 희귀질환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제가 있는 희귀질환은 전체 알려진 희귀질환의 5%에 불과하여 의학적 미충족 수요가 여전히 높은 상황이다.

희귀질환 치료제의 선도적 특징과 함께 촉발되는 의학적 담론들
진단-치료-급여에 관한 의학계 주요 논점들을 논의해가며 계속 성장하고 있는 희귀질환 시장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무엇일까.

① 진단에 있어서 인공지능(AI), 전장엑솜시퀀싱, NGS와 유전자 변이해석 등과 같이 첨단 기술적 진보들이 전향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의료현장이다.

② 적은 수의 환자 및 모집절차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치료의 임상적 유효성, 안정성을 평가하기 위해 임상시험의 혁신적 방법론(RWE·RWD·Registry·합성대조군)이 적극적으로 모색되는 테스트베드다.

③ 많은 희귀질환이 단일 유전자 질환 양상을 보임으로써, 다양한 효소(단백질) 기반 의약품, mRNA 치료제, 세포치료제, 그리고 가장 최근의 크리스퍼(CRISPR-Cas9)를 이용한 유전자 교정까지, 전에 없던 새로운 치료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질환군이다.

④ 혁신적 치료제들인 만큼 고가의 의약품들이 포진한 시장이므로 치료제의 임상적 유효성을 넘어 급여정책에 대한 사회적·정책적 논의, 진단의 비용효과성과 같은 다양한 딜레마들을 새롭게 해결해가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다.
[조인수의 희귀질환 이야기] 희귀질환 치료제 등장, 얼룩말을 의심해야만 하는 시대
희귀는 희귀하지 않다, 단지 특별할 뿐
우드워드 박사의 얼룩말은 오늘날 희귀질환을 상징하는 심벌로 활용되면서, 전 세계 다양한 희귀 질환 환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앞서 등장한 현존하는 5% 정도의 치료제들은 의학계 모든 종류의 어젠다들을 질문해오면서, 환자들의 곁에 다가서고 있다. 치료제의 등장으로 우리가 얼룩말을 의심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질 수 있었으며, 치료제의 등장으로 얼룩말을 의심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희귀질환자(세계 인 구의 약 4% 이상, 약 3억 명)만 모인 한 국가가 있다면, 이는 3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한다. “희귀는 희귀하지 않다. 단지 특별할 뿐”이라는 구호가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환자가 미진단 된 상태에서 ‘진단방랑’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많은 의심이 필요할 것이며, 그중 일부는 현존하는 치료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환자군일 것이다.

이제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얼룩 말보다 말을 먼저 생각하라는 확률적 의심보다는 오늘날까지 기술과 근거로 쌓아올린 과학적인 의심이다.

이 모든 것은 환자들을 만나는 의료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실제로 희귀질환 분야는 임상의사의 축적된 경험과 다양한 전문분야의 협진, 고난도 진단 및 치료에 대한 기술적 이해들을 요구하는 분야다.

의료현장에서 끊임없이 얼룩말을 의심하기 위한 노력과 근거 확립, 정보와 경험의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업에서도 의료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술과 치료제들을 통해 기업이 할 수 있는 일들로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저자 소개>

[조인수의 희귀질환 이야기] 희귀질환 치료제 등장, 얼룩말을 의심해야만 하는 시대
조인수

사노피-아벤티스 코리아 스페셜티케어 사업부에서 희귀질환 메디컬팀을 맡고 있다. 베링거인겔하임, 바이엘 임상의학부팀에서 한국 및 아시아 국가의 혁신신약 도입을 위한 임상연구와 의과학자문으로 근무했다. KOTRA-Grants4Apps의 스타트업 육성프로
그램에서 헬스케어 스타트업 글로벌 진출 및 제약사 지원 연계 역할을 수행한 바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8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