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노동조합이 기업 재산을 보호하려는 조치 없이 파업해 손실이 발생한 경우, 기업이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할 수 있다는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지금까지는 노조의 쟁의 행위는 1935년 제정된 전국노동관계법(NLRA)의 광범위한 보호를 받아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웠는데 이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노란봉투법’이란 이름으로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기업의 입증 책임을 강화하는 사실상의 ‘파업조장법’ 입법을 추진해 논란이 벌어진 한국과 대조적이란 지적이 나온다.

미 연방대법원은 1일(현지시간) 레미콘 업체 글레이셔노스웨스트가 노조인 ‘국제 트럭 운전자 연대’에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연방대법원은 이 소송을 각하한 워싱턴주 대법원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보고, 소송을 받아들이라는 취지로 되돌려보냈다. 연방대법관 여덟 명이 의견을 같이했고, 한 명만 반대했다.

글레이셔노스웨스트 소속 레미콘 운전사들은 2017년 단체협약 협상이 결렬되자 콘크리트로 가득 찬 트럭을 두고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 측은 파업에 불참한 직원과 관리자를 동원해 긴급히 차량에 실린 콘크리트를 제거했다. 그러나 대량의 콘크리트를 못 쓰게 됐을 뿐만 아니라 계약을 이행하지 못해 10만달러(약 1억3100만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회사 측은 노조가 의도적으로 손실을 입혔다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워싱턴주 대법원은 콘크리트 손실은 파업에 따른 부수적 피해에 불과해 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NLRA가 보호하는 쟁의행위 관련 분쟁은 연방노동관계위원회의 조정 대상일 뿐이란 취지다.

반면 연방대법원은 “노조가 레미콘이 실린 트럭을 방치해 트럭이 손상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했다”며 “이는 NLRA의 보호 범위를 뛰어넘는 행위”라며 워싱턴주 대법원 결정을 뒤집었다.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이 작성한 다수 의견에는 ‘노조가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합리적인 예방 조치를 하기보다는 회사 재산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를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이번 판결로 미국에선 노조의 불법행위 등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샬럿 가든 미네소타대 법학과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노조가 기습 파업을 하는 대신 사전에 통고하는 등 덜 위협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공동 불법행위를 한 가해자들이 연대 배상책임을 지도록 한 일반법과 달리 기업 측이 개개인의 행위를 입증하게 한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이 통과되면 불법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다수 근로자가 가담한 가운데 이뤄진 불법 파업에서 개별 근로자가 각각 어떤 행위를 했는지 기업이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