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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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단절보다 더 무서운 건 탈(脫)대만이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대형 기술기업)들의 당면 과제가 된 '대만 벗어나기'가 혹독한 대가로 돌아올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서방 기업들의 공급망 재편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중국이 대만 봉쇄 군사 훈련 등으로 맞불을 놓으면서다.

이는 서방 기업들로서는 더 큰 난관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시작된 미·중 간 지정학적 긴장으로 인해 공급망을 기껏 대만으로 옮겨놨더니 이젠 대만마저 떠나야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31일(현지시간) "중국과의 분리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대만과의 단절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돼 있는 기업이 몇이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인텔, AMD, 메타, 구글, 아마존 등은 지난해 중반부터 공급업체들에 "중국과 대만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HP, 델(Dell)은 더욱 구체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능력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델은 내년 안에 중국산 칩 생산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본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어드밴테스트의 한 임원은 "우리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공급망 중단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업무연속성계획(BCP)을 세워놨다"면서도 "하지만 대만 해협에서 실제로 분쟁이 발생하면 솔직히 그 어떤 BCP도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대만 TSMC의 비메모리 반도체 칩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경우 이를 납품받는 전 세계 전자기기 제조사의 매출 손실 규모는 5000억달러(약 659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 연구기관 로듐그룹은 최근 "대만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 2조달러 가치를 웃도는 경제 활동이 순식간에 흔들릴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 전자기기 업체 콤팔의 한 고위급 임원은 "사람들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만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며 "이는 단순히 반도체 칩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쇄회로기판, 렌즈, 케이스, 각종 전자부품에다 그 조립 과정에 이르기까지 대만의 역할은 엄청나다"고 말했다. 그는 "대만이 뚫리면 전 세계 공급망 전체가 일시 마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콤팔은 HP, 애플 등의 주요 공급사다.

애플의 한 대만 공급업체 임원은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성장했지만 이제 좋은 시절은 끝났다"며 "중국이 경제 성장보다 정치를 우선시하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동남아와 인도로 생산 설비 이전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화학 소재 기업 머크의 아시아 담당 임원 벤자민 하인은 "공급망 재편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는 없다"며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보려면 최소 5년, 심지어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미국 정부는 작년 통과시킨 칩스법을 통해 반도체 공급망 재건에 중점을 맞추고 있다. TSMC, 삼성전자 등 아시아의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에 설비 투자를 하도록 각종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말 TSMC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생산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미국 정부의 공급망 재편 노력의 결실이다. 애플은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칩을 아이폰에 탑재할 계획이다. 하지만 FT는 "다른 공급망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애플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칩만 남고 정작 이를 탑재할 기기가 없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