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 미국 은행권 위기가 금융 개혁의 미완성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980년대 은행 줄도산을 겪은 뒤 40년간 제대로 된 금융 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2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해 은행 위기가 1980년대 은행 줄도산 사태와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1980년부터 시작된 은행 파산사태는 1994년까지 1617개 은행과 1295개의 저축은행이 파산하거나 정부 지원금을 받아 연명했다.

두 사태 모두 높은 금리 수준이 파산의 원인을 제공했다. 1980년대에는 폴 볼커 미 중앙은행(Fed) 의장의 주도로 금리는 19%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제롬 파월 Fed 의장도 인플레이션을 꺾기 위해 금리를 1년 새 4%대로 끌어올렸다.

금리가 급격히 치솟자 은행이 보유한 자산의 가치가 급감했다. 자산과 부채의 듀레이션(잔존 만기) 격차가 위험할 정도로 벌어졌다. 1980년대 미 정부는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을 장려했다. 주로 30~40년짜리 장기 대출 상품이었다. 대출금을 상환받는 시점보다 당장 갚아야 할 이자 비용 탓에 저축은행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SVB도 듀레이션 관리에 실패하며 파산했다는 분석이다. 단기 부채를 늘리고 장기 대출 상품을 내놓으며 자산과 부채의 만기 차이가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또 저금리로 자본을 조달해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 전략을 택했다. 금리가 치솟자 SVB도 두 전략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사태를 키운 배경엔 회계 부실이 있다. 두 사태 모두 손실을 인식한 시점이 너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장 가치가 아닌 장부 가치로 자산을 평가해서 발생한 문제다. 자산을 매입한 금액 그대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치가 쪼그라드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파산한 셈이다. 자산이 축소되는 가운데 상업용 부동산 대출 상품 부실화에 이어 1982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에너지 기업 대출 부실이 잇따르며 은행이 줄도산했다.

1991년 연방주택대부은행(FHLB)은 "시장 가치로 평가를 해야 하는 게 반드시 달성해야 할 개혁 목표다"라고 명시했을 정도다. 같은 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은행과 저축은행 등의 자본 비율이 일정 수준 밑으로 떨어졌을 때 '즉각적인 시정 조치'를 하도록 규제를 강화했다. 은행은 FDIC로부터 매년 감사를 받게 됐고 자본이 부족한 금융기관은 예금 중개가 금지됐다.

하지만 올해 SVB 사태가 터지며 금융 개혁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만기 보유 금융자산은 여전히 장부가격으로 회계처리가 됐기 때문이다. WSJ에 따르면 지난해 말 SVB의 자산은 1230억달러 규모로 인식됐다. 대출금은 736억달러에 불과했다.

금리가 상승해 시장 가치는 160억달러 감소해 FHLB로부터 150억달러를 빌렸지만, 여전히 장부에는 매입한 금액 그대로 적혀있었다. 만기 보유 금융자산도 240억달러가량 가치가 축소됐다. 예금주들이 맡긴 예금의 94%는 무보험 예금에 속했다.

유럽의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는 SVB 파산을 계기로 미국의 금융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주로 4가지를 개혁 목표로 꼽았다.

은행업계의 상황을 판단할 때는 시장 가치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금융당국이 대응 조치할 때는 신속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게 두 번째 조언이다. 끝으로 예금 보험 한도를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도 덧붙였다.

찰스 칼로미리스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퍼트리는 대중 운동도 필요하다"며 "금융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 강화돼야 의미 있는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