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남부 유럽을 강타한 재정 위기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40여 년 만에 최악인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긴축 기조로 빠르게 돌아서면서다.

16일(현지시간)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독일 국채(분트)와 이탈리아 국채의 10년 만기 기준 금리격차(스프레드)는 2.0%포인트를 기록했다. 이탈리아 채권 금리가 독일보다 이만큼 높다는 의미다. 격차가 확대될수록 이탈리아 정부의 이자 등 상환 부담은 커진다.

부채 위기 재연되나

지난 14일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8년 만에 처음으로 연 4%대로 치솟았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2020년 5월 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EU 긴축에 남유럽 휘청…"2012년 재정위기 또 온다"
질 뫼크 프랑스 AXA그룹 수석경제학자는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에 “2010년대 유럽을 수렁에 몰아넣었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채무위기의 데자뷔가 느껴진다”고 밝혔다. 국채 금리 상승은 이탈리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페인, 그리스 등 고질적인 재정난을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 금리도 최근 급격히 오르고 있다.

ECB가 기준금리를 올릴 경우 이들 국가의 차입비용이 불어날 것이란 우려 때문에 투자자들이 국채를 내다팔고 있는 것이다. 국채 가격 하락은 곧 국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로존 경제가 분열될 것이란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것도 유로존 회원국 간 채권금리 격차가 벌어지는 속도가 가팔라지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FT는 “지금의 상황은 2012년 유로존 채무위기에 비해 더 심각하다”는 진단도 내놨다. 유로존 일부 국가의 재정지출 규모가 10년 전보다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대유행)으로 남유럽 국가들의 주요 수입원인 관광산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유럽 국가들이 지출을 늘리게 하는 악재다.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12년 127%에서 현재 150%로 높아졌다. 그리스도 같은 기간 162%에서 185%로 확대됐다. 경기 둔화로 각국 유로존의 세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걱정스럽다는 분석이다.

위기 대응 나선 ECB

긴축에 나선 ECB는 최근 “오는 7월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리고 9월에도 추가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5월 유로존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보다 8.1% 뛰어오르는 등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ECB는 한 번에 0.5%포인트를 올리는 빅스텝 가능성도 열어놨다. 글로벌 금융사 ING의 금리 전략가인 앙투완 부베는 “ECB의 공격적인 긴축은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해 이탈리아 등 취약 국가들의 국채부터 시장에 내던지는 투매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가 위기에 빠지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이날 유로존 재무장관 회담에서 회원국 간 채권금리 차이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면 새로 만들고 있는 위기 대응 장치를 곧바로 가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무장관 회담에서 비이성적인 시장 움직임이 회원국에 압력으로 작용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새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일각에선 유로존을 바라보는 비관적인 시각이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의 선임 경제고문인 프란체스코 지아바치는 “2010년대 재정위기를 겪은 ECB와 각 회원국의 중앙은행은 위기 대처 능력이 탄탄해졌다”며 “EU는 공동 기금 등을 통해 회원국의 채무 비율을 줄여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