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하원 총선에서 중도좌파 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중도보수 여당인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을 누르고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퇴임을 앞둔 독일이 16년 만의 정권 교체를 눈앞에 두게 됐다. 하지만 1·2위 정당 득표율 차이가 1.6%포인트에 불과해 연정 구성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독일 사민당 초박빙 승리…복잡해진 '연정 셈법'
독일 연방선거관리위원회는 전날 치러진 하원선거 잠정 집계 결과 사민당이 25.7%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고 27일 발표했다.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 연합은 24.1%로 2위에 그쳤다. 다음달 15일 의회에서 최종 선거 결과를 공표할 예정이다.

독일 국민이 견제와 균형을 택했다는 분석이다. 독일 연방정부 선거 역사상 득표율이 30%를 넘는 정당이 한 곳도 나오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부지역 매체 쥐트도이치자이퉁은 선거 결과가 모순이라고 논평했다. 이 신문은 “독일 최대 정당이 이처럼 나약한 적은 없었다”며 “변화를 바라는 의지는 충분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불확실해 보인다”고 했다.

차기 총리에 한발 다가선 사람은 올라프 숄츠 사민당 대표다. 마지막 메르켈 정부가 출범하던 2018년부터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맡아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뚝뚝해 ‘로봇’이라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메르켈 퇴임 후 정책 연결성을 높이기엔 적임자라는 평가다. 최저임금 인상, 부유세 도입 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여당도 재집권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르민 라셰트 기민당 대표는 “항상 득표율이 높은 정당이 총리를 배출한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라셰트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해 ‘무색무취’란 평가가 많다. 지난 7월 독일 홍수 사태 때 피해 현장에서 함박웃음을 지어 비판을 받았다.

사민당은 하원 의석 735석 중 206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민당 연합은 196석이다. 14.8%의 지지를 받은 녹색당은 118석, 자유민주당(11.5%)은 92석을 차지하게 된다. 의회 과반을 확보하려면 반드시 연정이 필요하다.

기민당은 앞서 메르켈 4기 정부를 구성하면서 사민당과 힘을 합쳤다. 두 당이 다시 뭉칠 가능성은 낮다. 독일 연방정부 역사상 처음으로 3당 연정이 탄생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녹색당과 자민당이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당색은 각각 녹색과 노란색이다. 당색이 파란색인 사민당과 결합하면 ‘신호등’, 검은색인 기민당과 결합하면 ‘자메이카(국기 색)’ 연합이 탄생할 것이란 전망이다.

녹색당은 선거 후반 사민당과의 연정 계획을 내놓으면서 기민당을 압박했다. 결과에 따라 안나레나 베어보크 녹색당 대표는 핵심 부처 장관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 국민은 이번 선거에서 탄소중립 정책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 차기 정부가 친환경 정책에 속도를 낼 것이란 관측이다. 관건은 자민당의 결정이다. 기업 친화적 공약을 내세운 자민당은 기후변화 문제를 시장이 해결해야 한다며 녹색당과 다른 노선을 걸었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자민당 대표는 중도우파와의 협상을 선호한다는 견해를 밝혀왔다.

정부 구성이 미궁에 빠지면서 메르켈의 임기도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사민당과 기민당은 성탄절 이전까지 연정 협상을 마무리할 방침이다. 새 정부 출범이 12월 17일을 넘기면 메르켈은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전 총리를 제치고 독일 연방 최장수 총리에 오른다.

지방정부 윤곽도 구체화되고 있다. 총선과 함께 치러진 베를린주정부 지역선거에서 사민당이 승리했다. 프란치스카 기파이 가족부 장관이 베를린 첫 여성 시장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