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도 세 번 변한 '이자카야 유랑'…"이 사케가 최고였죠"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일본 이자카야 전문가 오타 가즈히코는 8월초 도쿄 미나토구 시로카네다이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지역에 따라 기후와 식성, 주산물은 물론 사람들의 기질과 언어까지 다른 일본의 향토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며 이자카야 예찬론을 시작했다.

그는 30년 넘게 직접 발굴한 일본 전역의 이자카야를 소개해 왔다. 본업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도후쿠예술공과대학 교수를 역임했지만 이자카야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자카야에 관련한 저서만 20권을 넘고, 1999년 '전국 이자카야 기행'을 시작으로 22년째 이자카야 맛집을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케이블TV에서 '일본 이자카야 톱 100'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돼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높다.

-자신의 대표작으로 '일본 이자카야 방랑기'를 꼽는데

=일본 최북단인 홋카이도 레분토 섬부터 남단 오키나와의 낙도까지 직접 가본 이자카야만 소개했다. 1년 예정이었던 연재 기간이 3년으로 늘면서 3권의 책이 됐다. 첫 1년은 다양한 지역의 이자카야를 방문하는 즐거움, 2년째는 이자카야의 민속학적 의미, 마지막 3년째는 그런 이자카야를 흥미로워하는 내 자신에 대한 고찰을 담았다.

-최종회가 한신·아와지 대지진(1995년 효고현 고베시 주변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6500여명이 사망했다.) 직후의 고베였다

=처음엔 재해지역에 어떻게 술을 마시러 가냐며 거절했지만 편집장이 "그 심정을 보듬고 다녀와 달라"고 했다. 큰 잔해더미는 치워졌지만 철거되지 못한 건물과 파편들이 여기저기 남아있던 때였다. 거기서 이자카야가 조금씩 영업을 재개하고 있었다. '큰 일도 일단락됐고 지금까지 수고했으니 이제 한 잔 합시다' 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마음을 열고 술 한 잔 나누지 않으면 인간은 해 나갈 수 없구나' 하는 이자카야의 진짜 가치를 깨달았다.

-30여년간의 저술 및 방송활동 덕분에 여성과 젊은 층의 외면을 받던 이자카야의 인기가 부활했다.

=버블(거품)경제가 무너지면서 무리해서 고급식당에 가는 게 자랑인 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럭셔리한 레스토랑보다 좀 더 차분한 곳에서 마음을 열고 얘기를 나누는데 가치를 두는 쪽으로 세태가 변했다. 특히 2000년대들어 가성비를 중시하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이자카야도 타깃을 중년 남성에서 여성 고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여성 고객의 맘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화장실에서부터 가게 분위기까지 전반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뤄졌다. 덕분에 여성과 젊은 층, 외국인 고객이 늘어났고, 이것이 다시 이자카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자카야의 변신은 어떤 단계를 거쳤나

=이자카야의 변혁기가 2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1990년대의 지역 사케 붐이다. 진짜 맛있는 사케는 대기업이 아니라 지역의 양조장이 만든다는 것을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00엔 더 비싸도 맛있는 지역 사케를 먹는 시대가 1차 이자카야 변혁기였다. 2차 변혁기는 높아진 사케의 질을 토대로 이자카야의 메뉴가 크게 바뀐 2000년대다.
오타 가즈히코 이자카야 순례의 원점인 도쿄 쓰키시마 지역의 이자카야.(자료 : 레티)
오타 가즈히코 이자카야 순례의 원점인 도쿄 쓰키시마 지역의 이자카야.(자료 : 레티)

◆사케의 지역성은 옛말…기술이 맛 좌우

-사케의 질이 급격히 향상된 비결은 뭔가

=만드는 사람이 젊은 사람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젊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거부감이 없다. 버려진 제조법을 부활시키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 한때 사케 양조업계도 고령화로 인한 세대교체가 과제였다. 20대~30대가 대거 양조업계에 뛰어들면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

-젊은 세대는 왜 양조업에 뛰어드나

=1년에 단 한번 결과가 나오는 순환성에 대한 로망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대량 생산 공장의 단순 반복작업과 달리 제조법을 조금씩 바꿀 때마다 결과물이 전혀 달라지는 걸 매년 확인하는데 매료된다고 한다.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젊은 세대의 양조업 진출도 유행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일본은 사케팬이 두터워 질 좋은 사케는 굳이 선전을 안해도 반드시 팔린다. 특히 도쿄의 사케팬들은 브랜드주의가 강하다. 새로운 사케 브랜드를 아는 것은 자랑이다. 이 때문에 좋은 술은 금방 호평이 나서 순식간에 다 팔린다. 이 또한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는 매력이다.

-사케는 지역성이 강하다고 하지 않나.

=옛날 얘기다. 이제는 지역성이 사라졌다. 온도관리가 가능해지고 사케의 핵심 원료인 쌀과 물마저 다른 지역에서 사오거나 직접 재배하거나 관리할 수 있다. 사케 맛을 좌우하는 것은 오직 기술이다.

-물과 쌀이 좋은 니가타, 야마가타, 후쿠시마를 사케 '빅3'라고 하지 않나.

=물론 좋은 사케가 많이 나는 지역이 니가타, 야마가타, 후쿠시마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이 사케의 맛을 결정한다.

-한국에서는 구보타와 닷사이 브랜드가 가장 인기인데

=개인적으로 구보타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다. 맛있지가 않다. 닷사이는 매우 맛있다. 하지만 조금도 흥미롭지가 않다. 사람들이 맛있어 할만한 부분의 최대공약수만 모아서 만든 술이라 대부분의 입에 맞겠지만 개인적인 매력이 없다. 너무 당연하달까.

사케도 개성이 강해서 '이 녀석 개성이 장난 아닌데'하는 면을 즐기는 술이다. 개성이 강한 술은 매년 조금씩 특성이 변한다. 그걸 즐기는 것도 재미다. 반면 닷사이 같은 대형 브랜드의 사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질이 나쁘지 않으니 세계적으로 잘 팔리겠지만 개인적으로 팬은 되지 않을 것 같다.

-추천 사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자카야에서 맛있게 마셨던 사케를 직접 사가는 것이다. 지금은 신슈(나가노 지역)의 사케가 가장 좋다.

-외국인에게 이자카야는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인 동시에 어려운 곳이다. 사케 종류도 많고 메뉴도 읽기 어렵다.

=영국의 펍, 독일 비어홀, 프랑스 카페, 이탈리아 바르 등 모든 나라에는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있다. 일본은 이자카야다. 일본인들의 일상 생활을 가장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 이자카야다. 이자카야 방문은 일본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언어는 이자카야를 어렵게 하는 부분이지만 그 또한 좋은 추억이 된다.

◆3대째 주인에 3대째 손님

강산도 세 번 변한 '이자카야 유랑'…"이 사케가 최고였죠"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가장 기억에 남는 이자카야는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당장 떠오르는 곳만 10~20곳은 된다. 프랜차이즈 이자카야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공장에서 만든 요리를 내놓을 뿐 향토요리를 메뉴에 반영하지 않는다. 반대로 가족이 경영하는 오래된 이자카야는 들를 가치가 있다.

-향토요리란 뭔가

오징어젓갈신문지구이(사진은 도쿄 시부야 고타로)
오징어젓갈신문지구이(사진은 도쿄 시부야 고타로)
=홋카이도 구시로시에 있는 이자카야 시라카바에는 오징어젓갈신문지구이라는 안주가 있다. 좋은 해산물은 모두 도회지로 보내고 남은 건 오징어 밖에 없던 가난한 시절의 요리다. 젓갈이 질리니 신문지 위에 구워먹던 게 이제는 별미가 됐다. 특히 구시로 사람들은 "전국지인 아사히신문는 안되고 홋카이도신문에 구워야 잉크 냄새가 적절히 섞이면서 제맛이 난다고들 한다". 향토색이 깊이 베어있는 이자카야는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가족이 경영하는 이자카야의 매력은

=이자카야를 경영하는 가족의 생애를 보는 것도 이자카야의 풍미다. 주인이 결혼을 하고, 딸이 일을 거들고, 학교를 파한 아이가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면 여주인이"선생님께 인사드려"하는. 가족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 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이자카야에는 가족의 스토리를 보는 재미가 있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곳이 아닌 건가

=이자카야를 즐기는 1단계가 기분 좋게 마시고 마음으로 즐기는 것, 2단계가 향토요리를 음미하는 것이라면 최고 단계는 이자카야와 사귀는 것이다. 수십년째 같은 이자카야를 출입하면서 초등학생 때 살갑게 굴던 주인집 딸이 어느새 새침한 여고생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들 가족의 생애를 함께 하는 것이 이자카야를 즐기는 최고 단계다.

3대째 주인에 단골도 3대째인 노포 이자카야에서 "자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마시지 않았다구!"하고 주인이 손님을 꾸짖는 것이 가능한 세계다. 초밥이나 튀김집은 다 먹으면 곧바로 돌아가야 되지만 이자카야는 술을 다 마셔도 그저 거기 있는게 좋아서 더 머무를 수 있다. 이런 장소는 이자카야 외에 없다.

-좁은 공간에서 주인과 손님들이 복닥복닥함을 즐기는 이자카야의 매력이 코로나19 이후 꺼려지고 있다

=밀접함을 즐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이를 뺏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밀접함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코로나19가 수습되면 이자카야의 수요도 즉시 회복될 것으로 본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혼술', '홈술'이 뜨고 있다.

=각자 매력이 있지만 별개의 세계다. 혼술과 홈술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자신과의 인연을 확인하는 술자리라면 이자카야는 타인과의 인연을 확인하는 곳이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