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비 소송' 2심 패소후 상고 포기…"조속한 구제 이뤄져야"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의 히로시마(廣島) 원폭 투하로 생긴 피해자들에 대한 원호 범위를 둘러싼 이른바 '검은비'(黑い雨) 소송에서 피고 측인 일본 정부(국가)가 상고를 포기해 피해자 측 승소가 확정됐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는 26일 이 소송 2심 재판부인 히로시마 고등재판소(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상고하지 말도록 법무성과 후생노동성 등 관계부처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집권 때인 작년 8월 1심 판결에 불복한 국가 측 항소로 연장됐던 법정 다툼이 2심에서 끝나게 됐다.

스가 총리는 이날 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원고 측의) 많은 분이 고령이고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다"며 조속한 구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상고 포기 이유를 설명했다.

원고 전원에게는 즉각 피폭자 건강 수첩이 발급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日스가, 원폭소송서 아베와 다른 결정…원거리피폭자 승소 인정
일본 정부의 상고 포기 결정은 아베 전 총리와 스가 현 총리가 같은 사안을 놓고 다른 판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지난 14일 미군의 1945년 원폭 투하 당시 국가가 지정한 원호 대상 지역이 아닌 곳에 있다가 피폭당한 84명이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 등을 상대로 제기한 피폭자 건강수첩 교부 불허 처분 취소 청구 관련 항소심에서 원고 주장을 받아들여 국가 측 항소를 기각했다.

2심 재판부는 피폭자원호법에 따른 피해자 인정 요건에 대해 "방사능에 의한 건강피해가 부정될 수 없는 점을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원고들이 원호 대상 피폭자에 해당한다는 1심 판단을 유지했다.

이 소송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6일 단행된 미군의 히로시마 원폭 공격에서 비롯됐다.

일본 정부는 원폭 투하 직후 히로시마 기상대의 조사 자료 등을 근거로 1976년 방사성 물질이 포함된 검은 비가 쏟아진 것으로 추정되는 히로시마시 피폭 중심지에서 북서쪽으로 길이 19㎞, 폭 11㎞의 타원형 지역을 '특례구역'으로 지정했다.

특례구역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무료 건강진단 혜택을 주고 특정 질환이 있는 경우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급해 다양한 원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1995년부터 피폭자원호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특례구역 바깥의 피폭 중심지에서 약 8~29㎞ 지점에 있던 히로시마 주민들이 검은 비를 맞고도 피폭자원호법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논란이 일면서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가 주민조사를 진행했다.

日스가, 원폭소송서 아베와 다른 결정…원거리피폭자 승소 인정
히로시마현 등은 조사 결과를 근거로 기존 특례지역의 5배 규모인 히로시마시 거의 전역과 주변 지역을 특례구역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 짓고 중앙정부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지 못한 피폭자들은 결국 2015~2018년 잇따라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갔고, 작년 7월 29일 소송에 나섰던 84명 전원이 1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1심 재판부는 국가가 지정한 원호 구역 바깥에도 검은 비가 내렸을 가능성이 있어 피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봤다.

피폭자 건강수첩 발급 업무를 담당해 소송에서 피고가 된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는 1심 판결이 나온 뒤 곧바로 항소 포기 방침을 정하고 중앙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日스가, 원폭소송서 아베와 다른 결정…원거리피폭자 승소 인정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를 이끌던 아베 전 총리는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정됐던 특례구역을 기준으로 시행한 정책을 뒤집을 과학적·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항소를 지시해 2심 재판으로 이어졌다.

국가 측의 항소가 이뤄진 뒤 일본 내에선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피해자 모두가 고령자인 점 등을 들어 일부 언론은 피해자 구제를 뒷전으로 하는 국가 측의 항소가 취하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소송 과정에서 14명이 고령으로 사망했고, 유족이 원고 지위를 이어받아 소송에 참여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2심 판결 후에도 일본 정부는 상고 포기를 주장하는 히로시마 현, 시 측과의 지난 23일 3자 협의 때 상고 입장을 밝혔지만 히로시마 현 등이 정부 견해에 동의하지 않아 결국 상고 포기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스가 총리가 올 10월 임기가 끝나는 중의원을 다시 구성하는 총선을 앞두고 여론이 악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고 포기를 결정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