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홍콩·대만·신장 위구르 문제, 사우디아라비아 카슈끄지 암살 사건, 미얀마 군부 쿠데타 등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세계 경찰'을 자처해온 미국이 자국 내 인종 차별과 증오 범죄로 역풍을 맞고 있다. 국내 인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대립 관계에 놓인 나라들에만 목소리를 높여 오히려 반감을 부추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북한 "인권문제? 미국이 더 심각해"


지난 18일 미국 알래스카주(州) 앵커리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미중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미국에서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중국에서는 양제츠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과 왕이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각각 나섰다.

첫 만남이었던 만큼 '대화 무드' 조성 기대가 높았지만 양측은 말폭탄을 주고받았다. 포문을 연 것은 미국. 블링컨 장관은 "미국은 신장 위구르를 포함해 중국의 행동에 깊은 우려를 논의할 것"이라며 위구르족 탄압 이슈와 함께 홍콩·대만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거론했다.

인권 문제를 지적하자 중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양이 외교부장은 "위구르·홍콩·대만은 중국 영토"라며 "오히려 미국 인권이 최저 수준이다. 미국 내 많은 사람이 미국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받아쳤다. 지난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 차별 갈등을 언급했다.

북한도 합류했다. 미국이 대표적인 인권 유린 국가로 북한을 지목한 데 대해 북한 외무성은 지난 21일 홈페이지에 '인권범죄자의 인권 타령', '서방 나라들의 인종차별 행위는 철저히 종식돼야 한다', '흑백 전도의 극치' 3건의 글을 연이어 올렸다.

북한 외무성은 "얼마 전 유엔에서 세계인권교란과 재난의 장본인들인 서방 나라들이 다시 인권옹호의 간판 밑에 주제 넘게 우리를 비롯한 개별적 나라들의 인권을 문제시 했다"며 "오히려 서방나라들에서는 인민들이 각종 총기류, 흉기에 의한 범죄 희생물로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서방의 인권유린 실상이야말로 국제 사회가 바로잡아야 할 초미의 문제"라며 "오늘날 서방은 백인 지상주의와 인간증오 사상을 유포시키고 있다"고 강력 비판했다.

미국서 증오·혐오의 대상이 된 아시아계·무슬림

총격 사건 이후 수갑을 채운 채 경찰에 연행된 남성. 이 남성이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출처=트위터]
총격 사건 이후 수갑을 채운 채 경찰에 연행된 남성. 이 남성이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출처=트위터]
이들이 미국에 역공을 펼치는 배경에는 총기 사건이 있다. 지난 22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콜로라도주 볼더의 식품점에서 발행한 총기 참사로 경찰 1명을 포함해 10명이 숨졌다. 경찰은 체포 용의자를 상대로 수사를 진행 중인데 현지 언론은 용의자가 인종주의에 불만이 컸다고 보도했다.

총격범 아흐마드 알리사(21)는 시리아 출신 이민자이자 무슬림이다. 미국 인터넷 매체 데일리비스트는 알리사가 과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슬람 혐오에 대한 두려움을 주장했다고 소개했다.

콜로라도 참사 엿새 전 벌어진 애틀랜타 총격 사건도 일종의 증오 범죄다. 지난 16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스파 및 마사지숍 3곳에서 20대 백인이 총기를 난사했다. 이 사건으로 한인 4명을 포함해 모두 8명이 숨졌다. 희생자 중 6명이 아시아계였다.

현지 경찰은 총격범 로버트 에런 롱(21)을 체포했지만 증오 범죄 여부에 대한 결론은 유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곳곳에서는 "아시아인을 향한 증오와 인종차별을 멈추라"며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 뿌리 깊게 박힌 아시아인 차별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는 평가다.

지난해 미국 주요 도시 아시아계 겨냥한 범죄 폭증


문제는 이같은 인종 차별 참사가 앞으로 또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내 인종 갈등은 범죄로 표출되는 양상이다. 미국 증오·극단주의연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16개 주요 도시에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 범죄는 무려 149% 폭증했다.

인권을 강조하던 미국이 인권 문제로 역풍을 맞자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1일 성명을 통해 미국이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토착민주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언급했다. 이날은 1960년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대학살을 잊지 않고자 1970년대에 제정된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인종차별과 백인 우월주의가 오랫동안 미국을 괴롭혀온 추악한 독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에서 차별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을 바꿔야 한다"면서 "증오를 멈추기 위해 함께 협력하자"고 강조했다. 지난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아시아계 여성 6명을 포함한 8명이 숨진 총기 난사 사건을 '증오 범죄'로 취급하라는 요구가 커지는 가운데 나온 것이었다.

"평생 아시아인으로 살면서 조롱·경멸 겪어"


미국 정치권에서도 액션이 감지됐다. 아시아계 차별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한국계인 영 김 공화당 연방 하원의원은 "리더의 발언은 결과를 낳게 된다. 사람들이 가슴속 깊이 담기 때문에 특히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며 사실상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저격했다.

최근 뉴욕시장 출마를 선언한 대만계 정치인 앤드루 양도 지난 18일 "평생 아시아인으로 살면서 다른 이들의 태도와 조롱, 경멸을 겪었다"면서 "아시아인의 얼굴로는 미국인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최근엔 더 새롭고 치명적이며 독하고 혐오스러운 단계로 넘어갔다"고 경고했다.

지난 18일 하원 법사위원회에서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를 다루는 청문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선 최근 증가한 아시아인 대상 혐오 범죄의 해결 방법을 다뤘다. 도리스 마츠이(민주·캘리포니아), 그레이스 멍(민주·뉴욕), 주디 추(민주·캘리포니아) 하원의원과 등 아시아계 의원들이 이날 청문회에 출석해 미국 사회에 만연한 아시아인 대상 인종차별 실태를 증언했다.

이들 의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코로나를 '중국 바이러스'로 규정하면서 아시아인이 대유행에 책임이 있다는 분위기가 미국 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인종 차별에 갇힌 미국이 위기의 정점에 다다랐다"고 지적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