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선물시장에서 밀·콩·옥수수 등 주요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최근 기후가 급변해 작황이 타격을 받은 데다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운송 등 공급 차질이 커진 탓이다. 데이비드 비즐리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지난 14일 “세계가 코로나19만큼 심각한 ‘기아 팬데믹(대유행)’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콩 근월물인 내년 1월 인도분 선물은 부셸(27.2㎏)당 11.816달러에 거래돼 2016년 7월 후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옥수수 12월물은 42.26달러, 밀 12월물은 부셸당 59.92달러 선에 손바뀜됐다. 콩, 밀, 옥수수는 지난 6개월간 가격 상승폭이 38.5%, 31.0%, 20.0%에 달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가 집계하는 유엔곡물가격지수도 2년여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곡물가격지수는 전월대비 7.3% 급등한 111.6포인트를 냈다.
세계 곡물 공급망 깨져 가격 급등…글로벌 식량위기 '비상'

이상기후에 곡물 생산 타격

국제곡물위원회(IGC)는 지난 2개월간 올해 세계 총 곡물 생산량 전망치를 총 400만t 하향 조정했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에서 옥수수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봤다. 이는 최근 기후 온난화 여파로 각국에서 예상치 못했던 산불, 가뭄, 폭우, 태풍 등이 일어난 탓이다.

EU지구관측프로그램 연구기관 코페르니쿠스에 따르면 올해 1, 5, 9월은 각각 당월 사상 최고로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 러시아 중동 남미 호주 등에서 이상 고온 현상이 나타났다. 프레자 뱀보그 코페르니쿠스 선임 과학자는 “기온이 높아질수록 폭염과 집중호우 등 극단적인 기상 현상 발생 빈도가 커진다”고 설명했다.

이례적인 기상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계 식량 수입·수출 1위인 미국은 지난 9월 전국의 약 43%가 가뭄을 겪었다. 해안 지역에선 미국 본토 상륙 기준 100년여 만에 가장 많은 열대폭풍이 발생해 골머리를 앓았다. 중서부와 북부 평원 일대엔 평년보다 약 한 달 이른 서리가 내렸다. 식량 수입 2위국인 중국에선 쌀 생산의 70%를 차지하는 양쯔강 유역에 약 두 달간 기록적 폭우가 이어져 일대 농경지가 초토화됐다.


식량 수입 2위국인 중국도 대홍수로 식량위기가 악화됐다. 중국 쌀 생산의 70%를 차지하는 양쯔강 유역에 지난 8월까지 약 두 달간 기록적 폭우가 이어져 일대 농경지가 초토화됐다. 기후변화는 아프리카 각국과 중국, 파키스탄 등에는 대규모 메뚜기떼도 몰고 왔다. 폭우 후 날씨가 더워지면 메뚜기가 번식하기 좋은 고온다습한 환경이 조성되서다. 아프리카 사막메뚜기떼는 면적 1㎢ 규모 무리가 하루에 3만5000명분의 식량을 먹어치운다.

코로나19로 수확·물류작업 차질도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곡물시장 타격도 크다. 국가·지역 간 이동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수확철을 앞둔 지역도 이전처럼 외부에서 계절 노동자들을 대거 들이기 힘들어졌다. 유럽과 미국에선 코로나 3차 확산세가 커지면서 지역마다 재봉쇄 움직임이 일고 있다.

물류도 큰 문제다. 방역 조치로 무역항에서 처리하는 항만 물동 속도가 느려졌고, 운송비는 올랐다. 세계 대두 수출 1위국인 브라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한때 항구가 운영 차질을 빚어 병목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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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비 인상에 따라 판로가 깨진 사례도 있다. 지난 4~5월 벨기에 감자 농가 일부는 마진이 안 난다는 이유로 창고에 쌓인 감자 판매를 포기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식량 물류망이 망가진 탓에 세계 한쪽에선 식량이 썩어갈 때 다른 쪽은 굶주리기 쉬운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이유로 전문가들은 곡류값 상승세가 한동안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후변화와 코로나19 사태가 단기간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다. 트레이시 엘런 JP모간 상품전략가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최근 농산물 가격 상승에 베팅한 투자자들이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며 “상승장이 훨씬 더 오래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 '내 나라 식량 안보 챙기기' 나서

곡물 가격이 요동치면서 세계 각국은 최근 ‘식량 안보’ 강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간 외국에서 식량을 사들였던 국가들이 자국 내에서의 식량 생산 방법을 강구하고 자체 공급망 확보에 힘쓰고 있다. 기후변화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몰고 온 농산물판 ‘탈(脫)세계화’ 움직임이다.

중국이 식량 안보 지키기에 사활을 거는 대표적 국가다. 14억 인구 식량 확보가 어려워질 경우 정치적 불안이 촉발될 수 있어서다. 중국은 그간 식량 공급 불확실성을 막기 위해 아프리카나 아시아 곳곳의 농지를 사들였다. 미국 농무부 추산에 따르면 중국의 농림·어업 해외 직접투자 규모는 2006년 2억달러(약 2200억원)에서 2016년 33억달러(약 3조 6500억원)로 10년만에 10배 이상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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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자국내 식량 관련 정책도 강화하고 있다. 중국 국무원은 지난 17일 쌀 밀 옥수수 등 ‘3대 곡물’ 경작지에 대해 나무 심기 등 다른 경제활동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9월엔 논밭을 다른 용도로 쓴 사람을 처벌할 수 있게 하는 ‘경작지 비농업화 행위 제재’ 조치를 내놨다. 당국은 정기적으로 위성 등을 통해 경작지 현황을 감시할 방침이다.

이는 코로나19와 미·중 갈등, 홍수·가뭄 등을 거치는 와중에 자국 식량 자급률을 높이려는 조치다. 지난 8월 중국 사회과학원은 중국에서 2025년까지 밀, 쌀, 옥수수 등 3대 주요 곡물 공급량이 수요량에 비해 2500만t 부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같은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중국은 식량 안보에 관해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음식 낭비를 막을 관련법을 제정하라”고 말했다. 시진핑 주석이 음식 낭비 관련 발언을 한 첫 사례였다. 이에 중국 전역에선 대대적인 ‘잔반 금지’ 캠페인이 벌어졌다. 경작지 비농업화 제재 조치도 이후 잇따라 나왔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는 내년 2월부터 밀 수출량을 제한하는 쿼터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밀 공급량이 자국 내 소비량을 충족하고도 남지만, 내년 밀 작황 불확실성이 크다는 소식에 비축량을 늘리기로 했다. 러시아 타스통신은 “러시아 농업부는 식량 안보를 위해 수출보다 내수를 우선해야 한다는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각국, 식량기업 사들이고 팜테크 대거 투자

중동 주요 산유국은 ‘오일머니’를 식량산업에 쏟아붓고 있다. 식량 관련 기업 지분을 사들이고 팜테크(농업기술) 투자에도 나섰다.
세계 곡물 공급망 깨져 가격 급등…글로벌 식량위기 '비상'
식량 소비량의 80%를 수입하는 아랍에미리트(UAE)는 이달 11일 세계 4대 곡물기업 중 하나인 프랑스 루이드레퓌스의 지분 45%를 아부다비 국영기업 ADQ를 통해 인수하고, 같은 날 루이드레퓌스와 농산물 장기 공급 협정을 맺었다. UAE는 9월엔 팜테크기업 네 곳에 총 1억달러(약 1150억원)를 투자했다. 모래땅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하는 관개 시스템이나 인공광선만으로 작물을 재배하는 기술 등을 개발하는 게 목표다.
세계 곡물 공급망 깨져 가격 급등…글로벌 식량위기 '비상'
사우디아라비아는 5월 말 사우디 국부펀드(PIF) 산하기관을 통해 인도 쌀 생산기업인 다왓푸드의 지분 29.91%를 사들였다. PIF는 “쌀 공급망을 확보하겠다는 국가 전략에 따라 지분 인수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사우디는 자국 내 농촌 개발 프로그램에도 32억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싱가포르는 도시농업, 대체육, 식물성 단백질 생산 등 식품 연구 프로그램에 1억달러 이상을 배정할 계획이다. 싱가포르 식품청과 과학기술연구청 등은 이와 별개로 팜테크·식품 분야 스타트업에 보조금을 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식량 소비량의 90%를 수입한다. 이를 2030년까지 70% 수준으로 내리겠다는 목표다.

아르헨티나는 지난달 자국 바이오기업이 개발한 유전자조작(GMO) 밀에 대해 세계 최초로 상용화를 승인했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수년간 GMO 밀 상용화 승인을 두고 자국 내 농민단체 등과 줄다리기를 벌였다. 그러다 최근 GMO 밀 시장을 선점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 정부가 승인을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식탁 물가도 영향…한국 식량안보는 OECD 최저수준

최근 심화된 식량 공급망 불확실성은 국내 식품물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대두와 옥수수 등 사료 원료곡 가격이 높아지면 돼지고기 등 육류 가격이 오른다.

밀 가격도 그렇다. 밀 가격이 장기간 오르면 제분업체와 식품업체가 라면·빵·과자 등 제품 가격을 인상할 공산이 크다. 한국은 밀 소비량의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 시장 변화에 취약한 편이다.

최근 국내 식량자급률은 10년새 10%포인트 넘게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식량자급률은 사료용을 제외한 국내 농산물 소비량 대비 국내 생산량 비율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어기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받은 ‘국내 식량자급률 및 곡물자급률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식량자급률은 45.8%를 기록했다. 2009년 56.2%보다 10.4%포인트 낮다.

사료용을 포함해 농산물 자급률을 추산하는 곡물자급률은 같은 기간 29.6%에서 21.0%로 8.6%포인트 하락했다. 곡물자급률은 2009년을 정점으로 하향세다. 작년엔 최근 10여년 새 최저치를 찍었다. 농식품부는 2013년엔 2022년까지 식량자급률 목표를 60.0%로 잡았다. 2018년 이를 55.4%로 하향조정했지만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 내려잡은 목표치도 도달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국은 영국 이코노미스트그룹이 작년 말 발표한 세계식량안보지수(GFSI)에선 29위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신용평가기관 피치그룹 산하의 시장조사업체 피치솔루션스는 식량 위기가 현실화할 경우 먼저 타격을 받을 국가·지역으로 한국, 일본, 중국, 중동을 꼽았다. 피치솔루션스는 “식량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향후 식량 확보를 위해 막대한 지출을 감당해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