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예고했던 대로 보수 성향의 연방대법관 지명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미 헌법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는 대법원이 보수 절대 우위로 바뀌게 됐다. “대선 이후로 미루라”고 요구해온 민주당이 강력 반발하고 나서면서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법 판사(48)를 고(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후임으로 지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뛰어난 업적과 지성, 헌법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여성”이라고 소개했다. 가족과 함께 등장한 배럿 판사는 “미국을 사랑하고 헌법을 사랑한다”며 “매우 영광스럽다”고 했다.

종신직인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지만 상원 인사청문회 등 인준을 거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원을 상대로 ‘매우 빠른 인준’을 촉구했다.

배럿 판사가 대법관이 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당인 공화당이 상원 전체 100석 중 과반인 53석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2명의 공화당 상원의원이 대선 전 대법관 임명에 반대했으나 추가 이탈표가 나올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수주 내 인준 표결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들은 공화당이 다음달 12일 인준 절차에 착수해 13∼15일 청문회를 거쳐 하순에 전체 표결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세워놨다고 보도했다. 그렇게 진행되면 11월 3일 대선 전에 연방대법관 9명 중 보수주의 성향이 6명으로 늘어난다. 1991년 43세의 클래런스 토머스 이후 두 번째로 젊은 대법관이 탄생하는 기록도 세우게 된다. 여성으로선 역대 다섯 번째다.

배럿 판사는 법조계에선 정통 보수주의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판사는 정책 입안자가 아니며 법전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원칙주의자다. 테네시주 로즈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노터데임로스쿨을 수석 졸업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낙태 반대론자다. 5명을 출산했고 중미의 빈국 아이티에서 2명을 입양한 ‘다둥이 엄마’다. 총기 소지 권리를 옹호하고 반(反)이민 정책을 지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폐지를 공약한 보편의료 확대정책(오바마 케어)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민주당은 인준 과정에서 최대한 시간 끌기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는 “상원은 미국 국민이 다음 대통령과 의회를 선택할 때까지 행동을 취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도 “배럿 지명을 강력히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민주당이 지연 전술을 쓰겠지만 결국 배럿 인준은 확실해 보인다”고 내다봤다.

배럿 판사의 대법관 지명이 대선 쟁점으로 급부상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 간 첫 TV 토론이 오는 29일 열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대규모 유세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모두 세 차례 이뤄질 TV 토론이 막판 판세를 좌우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 정가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좀 더 유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부동산 개발사업가 시절인 1987년 《거래의 기술》 책을 펴냈을 정도로 협상에 능숙한 데다, 2003∼2015년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후보는 변호사 출신이지만 토론 능력이 떨어지고 말실수가 잦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토론을 몇 명이 시청할지도 관심사다. 역대 최고 시청 기록은 4년 전 트럼프-힐러리 간 첫 토론으로 8400만 명이 지켜봤다. 이번엔 1억 명을 돌파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