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생산된 프랑스 보르도 레드와인은 2018년에 제조된 와인보다 15~30%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 최상급 와인은 1병에 350~500달러, 그 아래 등급 와인은 100~175달러 수준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와인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코로나19 봉쇄 조치에 따라 술집들은 수 개월 간 문을 닫아야 했고, 여러 사람이 모이는 대형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된 탓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와인 가격이 떨어진 게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가 보르도 와인 업계에 좋은 이유'(Why covid-19 is good for Bordeaux wines)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 원인을 조목조목 소개했다.

통상 보르도 와인은 오크통에서 1년 정도 숙성된 상태에서 중매인에게 선불로 판매된다. 이렇게 덜 숙성된 와인을 '앙 쁘리뫼르'라고 부른다. 가격은 전문가가 매긴 맛 점수를 기준으로 책정된다. 중매인이 구매를 결정하면 와인은 2년 더 숙성을 거친 뒤 병에 담겨 판매된다. 이후 와인은 중매인→도매상인→중계도매상 및 수입업자→가게·식당 경로로 유통된다.

보르도 와인은 70여년 전부터 이런 구조로 유통돼왔다. 자금이 필요한 와이너리(포도주 양조장)와 저렴하게 와인을 사려는 중매인들의 수요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앙 쁘리뫼르는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바뀌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앙 쁘리뫼르를 구매해 2년 뒤 판매한 중매인들의 경우 평균 19%의 수익률을 거뒀다.

문제는 2015년께부터 발생했다. 중매인들이 구매 러시에 나서면서 앙 쁘리뫼르 가격이 최대 24% 증가했다. 하지만 와인 수요는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중매인들의 와인 재고 보유 기간은 2011년 평균 239일에서 2018년 313일로 급증했다. 앙 쁘리뫼르를 비싸게 사서 2년 뒤 저렴한 가격에 와인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미국이 유럽산 와인에 25%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면서 중매인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와인 가격을 낮춰야 하는 중매인들에게 코로나19 사태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구실이 됐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다. 와인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는 고질적인 와인 산업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며 "와인 생산자들은 향후 앙 쁘리뫼르 공급량을 줄여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