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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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생노동성이 이달 초 전국 직장인 약 240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재택근무 중”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5.6%에 불과했다. 한국 대기업의 48%, 공공기관 30%, 중소기업 24%가 재택근무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일본 언론들은 뿌리 깊은 ‘도장 문화’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공공기관 대민 창구와 기업 결재 과정에서 서류에 도장을 반드시 찍어야 하기 때문에 재택근무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사내 문서를 전자화했어도 상사의 실물 도장이 있어야 결재가 완료된다.

한 여성은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감염 위험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 목숨을 걸고 도장 받으러 회사에 나간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의 지하철 주요 16개 역에 등장한 옥외광고 문구도 이런 현실을 대변한다.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도장을 찍으러 출근했다.” 이 광고는 재택근무를 하고 싶어도 출근할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일본인들은 도장 문화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종이에 도장이 없으면 진짜라는 것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약서 원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누가 언제 작성해 누구 앞으로 보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사소한 것까지도 기록으로 남기는 일본인 특유의 강박증이 깔려 있다.

일본 사회의 연공서열식 경직성도 한 요인이다. 요즘은 많이 줄었지만, 일본 직장인들이 입사 후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가 ‘절 도장’이다. 결재란에 도장을 찍을 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으로 약간 기울여 찍는 것이 ‘무형의 예법’이다. 유일하게 도장을 세워 찍는 사람은 사장뿐이다.

또 하나는 이메일보다 종이 서류, 전화보다 공식 우편물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 때문이다. 첨단 정보를 다루는 일본의 대기업도 물건을 주문할 때는 반드시 우편으로 한다. 그래서 주문서가 담긴 우편물을 받아 처리하려면 회사에 나가야 한다.

일본 정부가 2017년 결재 서류의 디지털화를 추진한 적 있다. 회사 설립 때 인감도장 등록을 폐지하려 했지만 도장 업계의 로비 등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정보기술(IT) 산업을 총괄하는 과학기술상에 임명된 다케모토 나오카즈가 ‘일본의 인감 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 회장을 맡고 있어 논란을 빚었다.

도장 찍기(날인)와 종이·우편 등이 재택근무의 최대 방해꾼으로 지목되자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가 오늘(27일) 경제자문회의에서 행정절차상의 날인 관습 등을 바로잡으라고 각료들에게 지시할 계획이다. 앞으로 어떨지 두고 볼 일이다.

이와 관련, 일본계 인사 솔루션 기업 퍼솔코리아가 한국 내 일본계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재택근무 비율이 32.26%로 나타났다. 한국의 IT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기 때문으로 파악됐다.

일본의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현재 약 1만4000명, 사망자 수는 370여 명으로 한국(1만700여 명, 242명)을 추월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