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과 영국령 지브롤터가 유럽연합(EU)의 시리아 제재를 어겼다는 이유로 이란 유조선을 억류했다. 이란이 7일부터 핵협정 준수 범위 축소 2단계에 나서겠다고 밝힌 가운데 이번 사건까지 터지면서 서방국가와 이란 간 긴장이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다.

4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지브롤터 경찰과 세관당국은 영국 해군 군함의 도움을 받아 지브롤터 남쪽 4㎞ 해역에서 이란 유조선 ‘그레이스1’을 억류했다.

BBC에 따르면 이날 억류 작전엔 지브롤터 정부의 요청에 따라 파견된 영국 해군이 참여했다. 영국 외교부는 이날 “지브롤터 당국의 단호한 행동을 환영한다”는 성명도 냈다. 파비앙 피카르도 지브롤터 행정수반은 “그레이스1이 시리아의 바니아스 정유공장으로 원유를 운반하던 중이었다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며 “EU의 대(對)시리아 제재를 위반한 선박이어서 억류했다”고 밝혔다. EU는 시리아가 민간인을 탄압하고 있다는 이유로 2011년부터 제재를 적용하고 있다. 바니아스 정유공장은 2014년부터 EU 제재 대상이 됐다.

이란은 자국 유조선이 불법 나포됐다며 영국과 지브롤터를 비판했다. 압바스 무사비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이란 국영방송에 출연해 “이들의 행동은 ‘해적질’과 마찬가지로 법적·국제적 근거가 없다”며 “이란 주재 영국 대사를 초치해 정식 항의했다”고 말했다. 이어 “영국이 미국의 적대적인 (대이란) 정책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이번 일로 중동 역내 긴장이 고조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레이스1은 길이가 330m에 달하는 30만t급 대형 유조선이다. 로이터통신 등은 원유업계 전문가를 인용해 이 배가 이란 반다르 아살레항에서 이란 원유를 싣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시리아로 가기 위해 지중해로 진입하려다 억류됐다고 보도했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지름길인 수에즈 운하를 통하는 대신 지중해행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로이터통신은 “이 배는 서류상으론 파나마에 등록돼 있고 싱가포르 회사 소유지만 이란의 반응을 볼 때 사실상 이란 원유를 싣고 있는 이란 선박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이란과 영국 등 EU 국가 간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이란핵협정에 참여한 EU 당사국이다. 이란은 6일까지 이란핵협정 EU 당사국이 경제 지원 조치를 내놓지 않으면 핵협정 준수 범위를 더 좁히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영국 로펌 필스버리 윈스롭 쇼 피트먼에서 국제 제재를 담당하는 매튜 오레즈먼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EU 측이 제재를 어긴 선박에 공격적이고 공개적인 조치를 한 첫 사례”라며 “이란핵협정을 두고 이란이 협정 유럽 당사국에 내놓은 ‘벼랑 끝 전략’에 EU 국가도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영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대이란 제재에 사실상 동참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호세프 보렐 스페인 외무장관은 “그레이스1 억류가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번 억류를 두고 “좋은 소식”이라며 “미국과 동맹국들은 이란 시리아가 불법 거래로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