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EPA
사진=EPA
사우디 아라비아의 실권자로 오는 26~27일 방한을 앞두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MBS)가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개입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알자지라와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19일(현지시간) 아녜스 카라마르 특별보고관은 스위스 제네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서 100페이지 분량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고 빈 살만 왕세자를 사건 관계자로 공식 지목했다. 카슈끄지는 미국 영주권을 가진 언론인으로 워싱턴포스트 등에 사우디 왕실 문제를 비판하는 칼럼을 기고하다 작년 10월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됐다.

유엔이 카슈끄지 살해 사건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직접 지목한 것은 처음이다. 유엔은 지난 2월엔 사우디 정부가 카슈끄지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칼라마르 보고관은 지난 1월부터 6개월간 살해 사건 발생지인 터키를 찾아 현장 조사를 벌였다. 터키 당국으로부터도 일부 증거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칼라마르 보고관은 보고서에서 “빈 살만 왕세자를 비롯해 사우디 고위 인사들이 카슈끄지 살해에 개입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다”며 “카슈끄지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처형된 것이며, 이는 법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칼라마르 보고관은 카슈끄지 살해 사건이 많은 전문 인력과 자원을 들여 정교하게 이뤄졌다며 빈 살만 왕세자 등 고위급 인사들을 사건 배후로 지목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카슈끄지 살해사건엔 최소한 15명이 가담했고 이 과정에서 개인용 전세기도 두 대 운용됐다. 전세기 중 한 대는 외교 면책특권을 받은 비행기였다. 살해 후 증거를 인멸하는 과정에서는 터키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과 사우디 공무원, 법의학 전문가 등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도 드러났다.

칼라마르 보고관은 “유엔이 자문을 구한 전문가 모두는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작전(카슈끄지 살해)이 사우디 왕세자가 모른 채 이뤄질 수 없다고 했다”며 “최소한 카슈끄지를 겨냥해 어떤 불법적 지시가 내려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간 사우디 유력 인사들은 언론인과 인권운동가 등을 조직적으로 탄압해왔다”며 “아무리 보수적으로 보더라도 사우디 왕세자가 이런 탄압이 반복되는 것을 그간 최소한 묵인했고,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칼라마르 보고관은 빈 살만 왕세자와 사우드 알 카타니 전 사우디 왕실 자문 등을 대상으로 국제적 수사가 이뤄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우디가 자체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수사 등을 제대로 이행할지 보장할 수 없다”며 “유엔 등이 이 사안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또 “빈 살만 왕세자의 무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의 국외 자산을 동결하는 등 국제 사회가 제재에 나서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사우디 측은 그간 이번 사건이 일부 요원들에 의한 우발적 살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카슈끄지가 대화를 시도하던 요원들을 보고 비명을 지르자 요원들이 그를 조용히 시키려고 입을 막았고, 이 과정에서 카슈끄지가 질식해 죽었다는 주장이다.

반면 이번 유엔 보고서는 당시 정보요원들의 음성 녹음 필사본 등을 공개하고 사우디 요원들이 카슈끄지를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카슈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난 날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 먼저 도착해 있던 빈 살만 왕세자의 보디가드 마헤르 아불아지즈 알무트렙은 다른 정보요원에게 카슈끄지가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제물이 왔나”라는 질문을 했다.

모하마드 알 오타비 주이스탄불 사우디 영사는 당시 이스탄불을 찾은 사우디 정보요원들이 묵을 호텔 객실을 예약하기도 했다. 요원들은 마취제와 수건, 톱 등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칼라마르 보고관은 보고서에서 “녹음 파일에 따르면 카슈끄지가 죽은 직후 사우디 정보요원들은 어떤 놀라움도 표하지 않았다”며 “카슈끄지 도착 직전엔 사체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논의한 내용이 녹음파일에 포함됐다”고 썼다.

이번 보고서는 오는 26일 유엔 인권이사회에 정식 보고된다. 일각에선 유엔 보고서가 빈 살만 왕세자를 언론인 살해사건 배후로 지목하면서 빈 살만 왕세자의 향후 대외 활동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빈 살만 왕세자는 오는 26~27일 청와대의 공식 초청을 받아 방한한다. 청와대에 따르면 빈 살만 왕세자는 문재인 대통령과 26일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오는 28~29일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