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곤경에 처한 사우디 왕실을 지원하고 나서 주목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공식 성명을 통해 “어떤 경우든 미국은 사우디의 변함없는 동반자로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외신들은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 피살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에게 ‘정치적 면죄부를 준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빈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최고 실력자로 통한다. 이 때문에 미 정치권 안팎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무기 판매와 투자 유치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권 등 미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헌신짝처럼 내버렸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73년 이어진 밀월…실리 앞세운 트럼프, 사우디에 '카슈끄지 면죄부'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외교

트럼프 대통령은 성명에서 “빈살만 왕세자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며 “어떤 경우든 사우디와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했다. 카슈끄지 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보였던 미온적 태도에서 벗어나 사건 진상과 관계없이 빈살만 왕세자를 감싸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내놓은 것으로 해석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실리 중심으로 사우디와의 관계를 바라보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그는 “관계를 단절하면 기름값이 지붕을 뚫고 치솟을 것”이라며 “사우디와의 관계에서 바보처럼 굴어 미국 경제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세계 경제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유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사우디 왕실의 잘못을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사우디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최대 석유 생산국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최대 무기 수출국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는 4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고 이 가운데 1100억달러는 보잉과 록히드마틴 같은 미 방위산업 업체의 군사 장비를 구입하는 데 쓰인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어리석게도 이 계약들을 취소한다면 러시아와 중국이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리처드 머피 전 사우디 주재 미국 대사는 “트럼프 행정부가 사우디와의 외교 관계를 지렛대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민한 시기에 존 아비자이드 예비역 대장을 차기 사우디 주재 미국 대사로 지명한 것도 이 같은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머피 전 대사는 평가했다.

73년 묵은 미·사우디 ‘밀월’

트럼프 대통령이 성명을 통해 사우디 왕실을 지원하고 나서자 미국 정계와 언론은 즉각 반발했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비판이 잇따랐다.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도덕적인 목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며 “카슈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우리 국가안보에 이익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 폭군들에게 ‘미국 편을 들기만 하면 된다’는 매우 잘못된 메시지를 주고 있다”며 “수세대에 걸쳐 미국인이 소중히 여겨온 원칙들을 팔아넘기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외교전문매체 포린어페어는 미국이 빈살만 왕세자를 통제하지 못하는 이유가 194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과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사우디 국왕의 정상회담 이후 이어져온 사우디 왕실과의 밀월관계에 있다고 분석했다. 1933년부터 사우디에서 사업을 시작한 미국 에너지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두 국가는 군사와 산업 두 분야에서 밀접한 이해관계를 형성했다. 사우디는 중동에서 이란을 견제하는 미국의 전략적 축이기도 하다.

미국과 사우디는 백악관과 사우디 왕가의 ‘사적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 사이의 외교 관계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다. 사우디는 주미 대사로 반다르 빈술탄, 투르키 알파이살, 아델 알 주베이르, 칼리드 빈살만 왕자 등을 차례로 보내 미국 정치권과 사우디 왕실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9·11 테러범 중 사우디 출신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 주미 대사로 파견된 투르키 왕자는 양국의 긴장 관계를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 주미 대사인 칼리드 빈살만 왕자는 빈살만 왕세자의 친동생이다. 빈살만 형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사우디 관계의 ‘가족 비즈니스’ 성격이 더 짙어진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포린어페어는 분석했다.

외교무대 복귀하는 사우디 왕세자

사우디 실력자인 빈살만 왕세자는 23일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주변국 방문에 나섰다. 그는 이달 말 열리는 아르헨티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며 국제무대에 복귀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빈살만 왕세자를 지지해준 덕분이다.

포린폴리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카슈끄지 피살과 관련해 빈살만 왕세자의 책임을 묻지 않고 묵인하기로 한 것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는 ‘제2의 사담 후세인 사태’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을 젊은 시절부터 지원했다. 후세인은 미국 비호를 등에 업고 중동에서 힘을 키웠다. 결국 이라크는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미국과 정면충돌했다. 2003년 이라크전쟁을 통해 미국은 후세인을 축출했으나 이슬람국가(IS)가 이라크 북부지역을 점령하면서 또 다른 지역 불안을 가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명은 빈살만 왕세자에 대한 국내외 견제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확인해준 ‘백지수표’라는 분석이 많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이 형제상속 대신 부자상속을 선택하면서 왕실충성위원회는 유명무실화됐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묵인을 등에 업은 빈살만 왕세자를 누구도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에 힘이 실리고 있다. 빈살만 왕세자는 카슈끄지 피살 외에도 예멘 내전 개입, 카타르 단교, 캐나다와의 외교 마찰 등 여러 과격한 결정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포린폴리시는 지적했다.

사우디 내부에서도 권력이 더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빈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 피살 사건을 계기로 사우디 왕족과 정부 관료 등을 협박하고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오히려 키웠다고 전했다. 버나드 헤이켈 프린스턴대 교수는 “(사우디에서) 모든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온다”며 “살만 국왕이 빈살만 왕세자를 지지하는 이상 권력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73년 이어진 밀월…실리 앞세운 트럼프, 사우디에 '카슈끄지 면죄부'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