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러시아 전역 80여 개 도시에서 지난 몇 달간 수천 명이 참가한 반정부 집회가 열렸다. 중산층과 지식인, 학생뿐만 아니라 블루칼라 육체 노동자들도 많았다. 시위 배경과 정치적 맥락을 살펴보면 러시아의 빈곤과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허약함이 드러난다.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서유럽은 그런 러시아를 비웃기만 해선 안 된다. 국내 문제에 직면한 푸틴 대통령이 나라 밖에서 새로운 문제를 일으켜 정치적 돌파구를 찾으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위에 나선 이들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발표한 연금법 개정에 항의했다. 이 법은 정년 및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남성은 60세에서 65세로, 여성은 55세에서 60세로 각각 5살씩 늦추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여성은 55세에서 63세로 늦출 계획이었지만 국민적 반발이 거세게 일자 수급 개시 연령을 조금 앞당겼다. 러시아 정부는 이번 개혁으로 2024년까지 연간 150억달러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얼핏 봐선 이 개정안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할 만큼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러시아의 1인당 연금 수령액은 월 평균 220달러로 매우 적은 편이다. 이는 러시아의 빈곤선인 171달러를 조금 웃돌고,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러시아인의 평균 월 급여는 592달러로 보잘것없다. 이것이 오늘날 러시아가 거의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공식 통계로는 러시아 인구의 14%인 2000만 명이 빈곤 상태에 있다. 모스크바의 전문가들은 지난해 러시아인의 41%가 옷과 음식도 충분히 사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수많은 러시아인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빈곤하기는 매한가지다.

수백만 명의 러시아 국민에게 5년을 더 기다려야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67세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정년에 따르면 은퇴 후 연금을 2년도 받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남성이 말 그대로 일만 하다 죽을까봐 두려워한다. 지난달 러시아의 한 철도 근로자는 “연금 개혁으로 모든 것이 뒤로 밀린다면 나는 결코 일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국민은 정치에서 떨어져 있으라. 내가 당신들에게 안정을 주겠다”고 했다. 연금개혁 반대 시위는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국민이 맺은 이 같은 계약이 균열되는 조짐을 드러냈다. 이 계약은 2008~2009년 유가가 하락해 러시아 경제가 흔들렸을 때도 유지됐다. 당시 러시아는 경제적 어려움을 외부 요인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러시아인의 소득은 4년 연속 감소하고 있고, 이 고통은 러시아가 자초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푸틴 정권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생각한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8월29일 TV에 출연했다. 집권 18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껏 특정 정책에 대해 이렇게 지지를 호소한 적이 없다. 연설은 감동적이고 격정적이고 신랄했지만 국민 지지를 얻기엔 부족했다. TV 연설 전 여론조사에서 연금 개혁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6%, 반대는 80%였다. 연설 후엔 찬성 11%, 반대 75%였다.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인 여론조사 지지율은 연금 개혁안이 발표되기 전인 5월 79%에서 9월 67%까지 꾸준히 하락했다. 이 수치는 보통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기엔 매우 높은 것일 수 있지만 푸틴이 사실상 유일한 정치인이며 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 러시아에선 꽤 낮은 수치다.

푸틴 대통령의 두통은 서유럽에도 골치아픈 일이 될 수 있다. 그는 2013년 말 집권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자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여 크림반도를 차지했다. 이어 소치 동계올림픽을 떠들썩하게 열었다. 이후 군국주의가 바탕이 된 애국심은 푸틴 대통령이 누리는 인기의 바탕이 됐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적들에 둘러싸여 있고 대통령은 그들로부터 러시아인을 보호할 뿐 아니라 소련 붕괴로 잃어버린 옛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며 러시아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러시아 국민은 그동안 많은 것을 참았다. 크림반도 유지와 경제 개발에 연간 30억달러, 서방의 경제 제재에 따른 직간접 비용으로 1000억~1500억달러, 국방 현대화 프로그램에 6500억달러를 지출했다. 이외에도 군대와 경찰에 대한 재정지출은 앞으로 3년간 33%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금개혁 반대 시위는 러시아인들의 인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푸틴 대통령은 애국심에 불타는 호랑이 등에 타고 있다. 여기서 내려오기는 어렵다. 호랑이는 피가 흐르는 신선한 고기를 필요로 한다. 연금 개혁이 푸틴 대통령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크림반도를 점령했듯 다른 나라를 목표로 삼거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은 외국에서 모험을 벌이는 것이 국내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1코펙(러시아 화폐 단위·100코펙=1루블)의 양초가 모스크바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러시아 속담이 연금 개혁의 의미를 말해준다. 연간 재정지출 150억달러 감축은 크림반도 침략 등에 쓰인 러시아 국방비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나라를 화염에 휩싸이게 하는 촛불이 될 수 있다. 서유럽은 이 불길이 러시아 밖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원제=Russian Pensions and the Risk of War

정리=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column of the week] '절대권력' 푸틴조차도 골머리 앓는 연금 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