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미국 금리 인상 등에 따른 신흥국의 급격한 자본 유출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는 가운데 10일 아시아 각국 통화가치가 급락했다.

이날 인도 외환시장에서 루피화 환율은 사상 최고 수준인 달러당 74.43루피까지 치솟았다. 63루피 수준이던 연초와 비교하면 15%가량 가치가 절하된 것이다. 인도 정부는 해외에 거주하는 자국민에게 달러화 송금을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비상 대응에 나섰다.

올 들어 인도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선 110억달러의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갔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는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올해 인도의 경상수지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8%에 이르러 2013년 이후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날 파키스탄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소식은 신흥국 위기설에 불을 붙였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도 지난 8일 장중 한때 달러당 1만5427루피아까지 치솟는 등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인도네시아 환율이 달러당 1만5000루피아를 넘은 것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달 28일 술라웨시 섬에서 진도 7.5 규모의 강진과 쓰나미가 발생한 데 이어 파키스탄의 구제금융 여파로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다.

파키스탄의 IMF 구제금융 신청은 중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중국은 파키스탄에서 진행 중인 620억달러 규모의 도로, 발전소, 항구 건설 등과 관련해 대규모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경제규모에 비해 큰 금액은 아니지만 IMF가 향후 파키스탄과 채무 조정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제기된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파키스탄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면 중국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며 IMF의 자금 지원에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와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 등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발리를 찾은 국제기구 수장들은 미국 보호주의가 촉발한 무역 갈등을 해결하고 글로벌 경제성장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이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개정 협상 타결을 언급하며 “갈등을 화해로 바꾸는 데 이 기회를 활용하도록 하자”며 “우리는 현재의 무역체계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고치는 데 손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IMF는 전날 내놓은 세계경제전망(WEO) 보고서에서 미국과 중국의 무역갈등을 위험 요인으로 지목하면서 올해와 내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9%에서 3.7%로 조정했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세계 경제성장 둔화가 이미 빈곤 퇴치에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며 무역 갈등이 기업들의 투자에 제동을 걸고 있으며 성장을 저하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나라가 부정적 영향을 체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호베르토 아제베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트럼프 미 행정부의 맹공으로 위기에 처한 다자간 무역체계를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