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곳곳에 ‘임대 중’이라는 표지판이 붙은 빈 사무실이 눈에 띈다. 아예 통째로 비어 있는 건물도 적지 않았다. 불황의 흔적들이다.

버스로 40분을 달려 도심의 신타그마 광장부터 찾았다. 국회의사당 앞인 이 광장은 정부의 긴축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연일 이어졌던 곳. 지난 4일 이 곳에서 연금 축소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77세의 은퇴한 약사가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노인은 “음식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기 전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길을 가는 도중 소리를 지르고 있는 한 청년은 분노에 차 있었다. “저 빌딩(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이들(정치가)이 그를 죽였다. 그들이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다.”

◆올리브에 숨겨진 비극

그리스는 세계 3위 올리브 생산국가다. 하지만 이를 가공할 능력이 없다. 생산한 올리브의 60%를 이탈리아에 판다. 가격은 ㎏당 2.1유로. 헐값이다. 이탈리아는 올리브를 가공, 최종제품으로 만들어 ㎏당 3.1유로에 판다. 간단한 가공만으로 그리스가 파는 것보다 50% 비싸게 수출한다. 그리스의 제조업 경쟁력이 바닥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모두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폭스바겐 등 독일차가 가장 많이 보였다. 현대차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그리스에는 ‘볼펜 하나도 못 만드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맥킨지는 “그리스가 올리브와 요거트 등 주력 농산품의 가공산업만 발전시켜도 2021년까지 120만명의 일자리 창출과 12억유로의 무역수지 개선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끝나지 않은 악몽

신타그마 광장에서 만난 드미트리스(29·보석디자이너)라는 청년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대학생 엘레네(19)와 미르토(18)는 “아테네 내 기술전문학교들이 이틀째 문을 닫아 2만여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재정이 부족해 문을 닫는 학교가 늘고 있다는 얘기였다.

정치권의 잘못을 왜 국민이 떠안아야 하느냐는 불만은 극에 달해 있다. 지난해에만 7차례의 총파업이 있었다. 한 시민은 “내달 6일 총선에서 (다수당으로) 가장 유력한 신민주당이 연금을 지켜주겠다는 등의 공약을 내놓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다른 정당들도 이 공약을 비웃고 있다”고 전했다.

마놀리스 마마자키스 피레아스국립대 경제학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그리스인의 벌거벗은 모습, 흉악한 모습이 보였다”고 고백했다. 나태와 부패가 부른 위기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다.

◆재건 나서는 그리스

그리스에서 오후 2~5시는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다. 이 시간에 조금만 떠들어도 경찰에 고발한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 습관(?)이 깨지기 시작했다. 아테네 시내에는 오후 3~4시에도 문을 여는 상점들이 곳곳에 보였다.

국영자산 매각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영자산 민영화펀드의 코스타스 미트로파울로스 사장은 “공기업 주식과 사업 허가권, 공공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올해 안에 36억유로를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까지는 190억유로, 최종적으로 500억유로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라고 그는 설명했다.

지난달 28~31일 아테네에서 열린 국제모피 전시회는 전년 대비 규모가 두 배 커졌다. 모피는 관광, 해운, 농업에 이은 그리스 4위 수출산업이다. 치우카다리스 디미트리스 그리스모피협회장은 “정치인이 대거 물갈이되는 총선 이후 위기 해결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