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서 땀 빼고 한잔했다"

앙겔라 메르켈(55) 독일 총리는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사자의 대답은 지극히 평범해서 오히려 '뜻밖'이다.

땀을 쏟긴 했지만 역사적인 순간을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보는, 동시대인의 고뇌가 섞인 진땀은 아니었다.

메르켈 총리는 5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1989년 11월9일 밤 동독인들이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여자친구들과 함께 사우나로 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분위기가 며칠째 팽팽해서 무엇인가 벌어질 것 같았고 결국 텔레비전을 통해 국경이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때는 목요일이었는데, 목요일은 나의 사우나 데이(sauna day)였기 때문에 언제나 다니던 곳으로 갔다"며 특유의 '실용주의'가 묻어나는 답변을 했다.

메르켈 총리는 1954년 통독 전 서독 지역인 함부르크에서 출생했지만 같은 해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 브란덴부르크로 이주했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뒤 1978~89년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에서 일하던 그는 '세기의 대열'에 조금 늦게 동참한 셈이다.

메르켈 총리는 다른 동독인들과 달리 천천히 서구를 탐방하기로 했다면서 "장벽이 한번 무너졌으니 다시 닫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가족은 장벽이 무너지면 베를린의 켐핀스키(독일의 최고급 호텔)에서 굴을 먹자는 농담을 하곤 했지만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내가 굴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메르켈 총리는 사우나 후 친구들과 시원한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 밤늦게 보른홀머 다리의 인파에 합류했다.

서베를린에 도착해서는 한 가족의 초청을 받아 캔맥주로 장벽 붕괴를 기념했다며 "마냥 행복했다"고 술회했다.

동독 시절 동유럽으로 여행과 히치하이킹을 즐겼다는 메르켈 총리는 또 통일 전 서독을 "매우 위험한 곳"으로 여기며 일종의 두려움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면서 동독인을 비하한 오토 쉴리(사민당) 의원의 말에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고 고백했다.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즈음 동독 민주화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1991년 헬무트 콜 전 총리에 의해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전격 발탁, 이후 여성 정치인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는 오는 9일 다른 유럽 지도자들과 함께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기념해 30대 중반의 나이로 건넜던 보른홀머 다리를 다시 찾는다.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hanarmdr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