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의 출신국 독일에서 최근 `자본주의 논쟁'이 한창이다. 집권 사회민주당의 프란츠 뮌터페링 당수가 지난 달 중순 촉발시킨 이 논쟁은 독일의 여야 정치권과 노동계, 재계, 학계 등이 뒤얽혀 갈수록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1일 노동절을 기점으로 크게 증폭되는 양상이다. 이른바 유럽식 사회체제의 대표적 국가이자 세계 최대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독일에서 이러한 논쟁이 갈수록 뜨거워지자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 속에서 유사한 정치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들도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 논쟁의 발단 = 뮌터페링 당수는 지난 달 11일 연설에서 독일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자본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면서 국가 기능을 무자비할 정도로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를 쇠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현 경제 체제는 기껏해야 자본이 간접적 시혜를 베푸는 사회일 뿐이며, 사람들을 생산의 한 요소나 소비자 또는 노동시장의 상품으로서만 취급하고 있다"면서 `고삐없는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독일 내의 적지 않은 기업들이 마치 메뚜기 떼처럼 이익만 취한 뒤 사회적 결과는 아랑곳 없이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면서 "점점 커지는 자본의 권력을 제어할 당 내 특별위원회 설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독일 최대 민간은행인 도이체방크(DB)는 지난해 수익이 87%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6천400명을 자르고 일자리 1천200개를 해외로 이전시키면서도 천문학적인 경영진 봉급은 크게 올렸다"며 요제프 아커만 DB 최고경영자를 공격했다. ◇ 노동계와 재계 공방 = 최근 수년 간 경기침체와 `자본의 세계화'에 시달려온 노동계는 일단 뮌터페링 발언을 환영하면서 재계에 대한 반격에 나서고 있다. 노동계는 적지 않은 기업들이 엄청난 이익을 내면서도 대량 해고와 임금 삭감, 노동시간 연장, 일자리 해외이전 등을 하며 경영진 봉급과 주주 배당은 올리는 등 `벌거벗은 탐욕'을 부리고 있다고 공격했다. 노동계는 또 대규모 실업사태는 이윤 극대화만 추구하는 기업의 투자 부족과 사회적 책임감 결여, 그리고 이로 인한 내수 침체 때문이라며 자본을 통제할 구체적 정책들을 추진하라고 정치권에 촉구하고 있다. 반면 재계는 집권 사민당이 계급 투쟁을 부추기고 자본을 적대시함으로써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해 투자 위축과 생산시설 해외이전이 가속화되고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와 실업문제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독일산업연맹(BDI) 회장을 지낸 한스-올라프 헨켈 전(前) IBM 유럽 회장은 "요즘 상황은 1930년대 히틀러 치하에서 `대량실업과 경제난으로 인한 비극의 책임이 모두 외국인 투자자에게 있다'고 학교에서 배웠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 정치권 공방과 정부 입장 = 제1야당인 기민련은 "사민당이 실정(失政)을 가리고 좌파 당원들의 환심을 사려는 선거 전술을 또 구사하고 있으나 이미 떠난 유권자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며 일축했다. 재계와 가까운 자유민주당은 집권당이 계급투쟁을 선동하며 나라를 망치고 있다면서 "내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패배하고 이 사회의 재앙인 노총과 공공노조 간부진은 권력을 잃게 될 것"이라며 노조와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반면 사민당은 연일 `부도덕한 자본과 경영진들'을 비판하며 규제를 강화 추진책들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테 포크트 부당수의 경우 "대량해고를 일삼고 투자 없이 해외이전하려는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거론했다. 그러나 슈뢰더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짐짓 이번 논쟁에 거리를 두고 있다. 사민당이 전통적으로 노조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슈뢰더 총리는 작년에 이어 올해 노동절에도 노동계 주최 기념 행사에 2년 째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자리에선 "자본의 힘과 사회적 연대 책임이 긴밀히 연결된 독일식 사회체제는 단점 뿐아니라 장점도 있다"며 사민당을 간접 지원하고 있다. 재계의 우려와 비판에 대해서는 볼프강 클레멘트 경제ㆍ노동장관이 나서서 "사민당의 규제 강화 발언이 실제 정책화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무마하고 있다 ◇ 뮌터페링 발언 배경 = 학계와 언론계는 뮌터페링 발언을 5월 22일 실시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의회 선거용 전략으로 보고 있다. NRW주는 사민당이 39년 간 집권해온 아성이지만 최근 여론조사들에선 사민당 지지율이 보수 야당인 기독교민주연합에 비해 10%나 뒤떨어져 있다. 오랜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올들어 실업자 수가 2차대전 종전 이후 최대 규모인 500만명을 넘는 상황에서 중립적 유권자들의 지지가 추락한데다 전통적 사민당 지지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슈뢰더 정권의 `우파적 정책'에 배신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NRW주 선거 패배는 사민당으로선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는 일이자 내년 총선에서 정권을 내놓아야 할 전조(前兆)가 될 수 있다. 우파 일간지 디 벨트는 "뮌터페링의 급진적 발언은 투표장에 나가지 않으려는 사민당원들에게 외치는 소리이자 선거용 전술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중도 좌파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슈뢰더 총리와 볼프강 클레멘트 경제.노동장관 등이 심은 친기업적 이미지를 떨쳐내려는 사민당의 `필사적 시도'라고 평했다. ◇ 반응과 전망 = 사민당으로선 일단 `대기업 때리기' 혹은 `자본주의 논쟁'의 효과를 보고 있다. 언론사들의 여론조사 결과 뮌터페링 발언에 공감한다는 사람이 60%를 넘고, 대부분 기업이 사회 기여 보다 더 많은 이익만 취한다는 데 동의한 사람이 약 4분의 3이나 되는 등 대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런 여론이 실제 선거에서 사민당 지지표로 연결될 것인 지는 불투명하다. `신중도(新中道) 노선'을 내걸고 출범한 슈뢰더 정권이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사회복지 삭감을 하는 등 친기업적인 신자유주의정책을 폄으로써 전통적 지지자들을 배신했다고 보는 측에선 뮌터페링 발언에 냉소하는 경우가 많다. 뮌터페링 당수는 1일 노동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연설해야 했으며, 일부 노동자들로부터는 계란 투척을 당하기도 했다. 학계에선 대체로 뮌터페링 발언에 비판적인 가운데 사민당의 선거용 의도와 관계 없이 자본의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으론 현재 독일 경제 성장률이 EU 평균치에 크게 뒤지고, 침체에서 벗어날 뾰족한 단기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사민당의 자본주의 비판은 "만족시키기 매우 어려운 기대들로 가득찬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라는 평가도 있다. 오는 22일 NRW주 선거 결과와 이후 `자본주의 논쟁'의 전개 상황을 미리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단 독일에서의 이번 논쟁이 국경을 넘어 다른 유럽 국가들의 정치와 정책에도 파장을 미칠 것으로 독일 언론은 전망하고 있다. (베를린=연합뉴스) 최병국 특파원 choib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