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뉴욕 맨해튼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약 2백개의 스트리트(Street)중 남쪽 끝 오른편에 위치한 2백m 남짓의 길거리.

길이로 재나 번화한 정도 등 볼거리로 판단하면 분명 뉴욕에서는 "수준 미달급"에 속하는 곳이다.

한데 월가만큼 역사적이고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아내는 거리도 흔치 않다.

월가가 미국 역사 초기에 이민자들이 인디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둘러쳤던 긴 통나무벽(Wall)에서 유래돼 세계 유수의 경제지인 월 스트리트 저널의 제호로, 무엇보다 세계 최대 금융중심지로서의 상징어로까지 통하게 됐다는 것은 상식이다.

여기에 보태 월 스트리트 룰(Wall Street Rule), 월 스트리트 워크(Wall Street Walk)의 속뜻까지 깊숙이 파고들면 월가는 한층 더 탐구해 볼만한 선진 금융시장으로 다가온다

두 표현 모두 월가에선 ''투자한 상장기업의 경영실적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경영개선이나 경영진의 교체를 적극 요구하기보다는 참고 인내하며 그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거나 신 포도인 양 포기하고 팔아버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상장사들의 경영활동에 침묵하던 미국 기관투자가들의 과거 투자 관행을 집약해 주는 함축어다.

그런 소극적이던 투자관행이 바뀌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의 주식보유 수가 급증한 지난 90년부터다.

55년, 80년에 각각 23%, 33%였던 기관들의 주식 보유 비중은 90년 53%, 최근에는 60%로 늘어났다.

특히 주식 보유 비중이 급속히 높아진 연.기금 펀드들이 기관투자가들의 관행을 변화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다름아닌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에 불을 댕겼다.

미국 민간기구인 코퍼리트 거버넌스 네트워크(The Corporate Governance Network)에 따르면 연.기금의 주식 보유 비중은 0.8%(50년)에서 9.4%(70년) 18.5%(80년) 28%(90년) 최근 30% 이상으로 높아졌다.

이같은 주식 보유 비중은 연.기금 펀드들에 힘을 실어줬다.

퇴직연.기금의 주인인 개인이나 주(州) 등 투자자들을 대신해 적극적으로 주주권리를 요구하고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위탁 자산을 성실히 관리하고 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인식은 점점 확산되는 추세다.

더욱이 다른 기관투자가들의 평균 주식 보유 기간이 지난 60년 7년에서 최근에는 2년으로 짧아진 것과 달리 연.기금 펀드들은 이들에 비해 훨씬 장기적으로 투자하다 보니 주주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이 길다.

미국에서 연.기금 펀드가 주주행동주의의 중요한 축으로 상장사의 경영 활동을 눈을 부릅뜨고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장점 덕분이다.

게다가 연.기금이 경영 심판관으로 부상한 것은 미국 기관투자가협회(CII)라는 탄탄한 버팀목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CII는 캘리포니아주 공무원 퇴직연.기금(캘퍼스:CalPERS), 위스콘신주 공무원 퇴직연.기금, 플로리다주 신탁기금(FSBA), 미국 교직원 연.기금(TIAA-CREFF) 등이 주도하는 단체.

이들은 투자하고 있는 상장사에 공동으로 경영진 교체, 기업 지배 구조 및 영업실적 개선 등을 강력히 촉구하고 압력을 가한다.

지난 7월말 현재 자산 규모가 1천7백억달러에 이르는 캘퍼스.

이 연.기금의 경영 감시 활동은 월가에 진입한 상장사들 사이에 ''공포''의 대상으로 통한다.

지난 92∼93년 GM IBM 웨스팅하우스 등 3개 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을 경영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주총에서 갈아치운 예는 ''전설''로 화자되고 있다.

캘퍼스는 또 매년 주총 시즌을 앞두고 ''문제 기업''들을 경영감시대상 리스트에 올려 발표한다.

주식을 갖고 있는 1천6백여개 상장사에 장기적인 주가추이, 기업지배관행, 경제적 부가가치(EVA) 등의 예리한 잣대를 들이대 문제기업을 솎아낸다.

올해엔 반도체 업체로 이름 나 있는 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다바이스(AMD) 등 10개 상장사를 지목했다.

지난 97년에는 ''실적부진, 최고경영진의 PC사업부문 경험부족, 이사들의 높은 보수'' 등 경영 불만사항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애플컴퓨터를 경영감시대상 기업에 올려버렸다.

윌리엄 크리스트 캘퍼스 행정위원장은 "상장사의 경영개선을 압박해 장기적으로 수익성을 높이고 신뢰를 회복하도록 채찍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투자전문회사인 IIA의 해리 세거먼 회장은 "미국의 연.기금 기관들이 최근들어 국내 기업뿐 아니라 한국 등의 해외투자 기업에 대해서도 경영 감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펜실베이니아대의 제임스 홀리 교수와 앤드루 윌리엄스 교수는 미국 기관투자가들의 이런 주주행동주의를 ''신탁 자본주의의 도래''로 강조한다.

남용되지만 않으면 미국이라는 주식회사를 보다 더 민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촉매제라는 평가다.

[ 특별취재팀 : 한상춘 전문위원, 이학영 차장(국제부), 육동인 특파원(뉴욕), 강은구(영상정보부), 김홍열(증권1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