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식 "비밀주의"잔재가 베트남의 경제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경제자료까지 기밀서류로 분류하고 있는 베트남의 풍토탓에 외국 투자자들
이 통계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

이 때문에 각종 투자사업이 지연되고 회사신용평가를 위한 금융추적 작업도
중단되는등 문제점이 잇따르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기업에 대한 회계감사마저 거의 불가능한 상태.

베트남농업은행(VAB)의 회계감사를 맡았던 미회계법인 쿠퍼스 앤드
라이브랜드의 호치민지점 돈람 회계감사팀장은 "고객들이 회계감사와 세무
조사를 혼동하고 있다"며 "회계감사에 필요한 자료를 요구하면 베트남
기업들은 비밀자료라는 이유로공개를 꺼려하기 때문에 정보 하나를 얻는데도
3일씩 걸린다"고 푸념했다.

경제개혁과 함께 이같은 풍토가 나아지기는 하지만 감사절차등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심지어 회계감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외 신용도가 무너진다고
판단, 대부분의 베트남 기업들은 회계감사 사실을 비밀에 부치도록 요구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현재까지 회계감사를 받는데 동의한 기업은 불과 4개업체.

베트남 정부는 결산보고를 국제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지만 이런 "목표"와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는 셈이다.

미회계법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사의 이안 윌슨은 "베트남에서 회계감사의
정확한 개념이 정립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런 풍토 때문에 베트남 경제개혁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애매모호한 금융규제와 세제등 규정에 가로막혀 이미 투자인가를 받은
1백80억달러 상당의 외국인 자금이 베트남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만성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베트남 기업들의 해외차관 도입에도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베트남 기업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보니 차관대상기업에 대한 신용평가
를 내리지 못해 쉽사리 돈을 꿔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시장경제의 핵심요소인 주식시장 개설이 늦어지는 것도 바로 이같은
비밀주의 잔재탓이다.

국제수준의 회계감사가 적용될때까지 주식시장에 상장될 회사를 가려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오는 99년까지 베트남에 증시가 열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간
적정 회계감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회계감사제도가 정착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올바른 회계감사를 통해 국영기업의 악성부채를 가려내고 이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베트남 국영기업가 안고 있는 상환불능 부채는 국내총생산의 약 1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계문화"의 뿌리가 없는 베트남에서 그나마 얼마 안되는 공식자료들마저
신뢰도가 낮다는 점도 큰 골칫거리다.

베트남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이중장부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베트남 정부는 이런 분위기를 쇄신하기는 커녕 오히려 비밀주의를 부채질
하고 있다.

베트남군 기관지 "콴도이난단"은 최근 보도를 통해 "등짐장수들이 기술
비밀을 훔치고 있으며 기업들은 세미나를 이용, 비밀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고 경고했다.

지난주에는 집권 공산당이 "당이나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준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 가뜩이나 부족한 통계마인드를 더욱 위축
시켰다.

지난 10여년간 베트남의 얼굴을 뒤바꿔 놓은 개혁열풍이 은밀한 "비밀주의"
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