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윤 회장은 “혁신 스타트업이 전문가 단체의 저항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기득권이 혁신기업의 발목을 잡는 ‘제2의 타다’ 사태를 또다시 만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17일 제15대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에 취임했다.   이솔  기자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윤 회장은 “혁신 스타트업이 전문가 단체의 저항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기득권이 혁신기업의 발목을 잡는 ‘제2의 타다’ 사태를 또다시 만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17일 제15대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에 취임했다. 이솔 기자
“기술이 삶을 변화시킬 때 폭발력을 갖고 성장합니다. 하지만 삶은 기존 세력에 조종당하기도 하죠. 혁신기업이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혀 더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인공지능(AI) 챗봇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같은 서비스가 한국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은 이렇게 진단했다.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3’에서 최고 혁신상 절반을 국내 기업이 휩쓸 정도지만, 기득권 저항에 스타트업이 성장을 멈추기 일쑤라는 것이다. 타다의 모빌리티 혁신이 택시업계의 강한 압력에 좌초됐고, 지금은 로톡·직방·삼쩜삼 등 유망 플랫폼이 ‘제2의 타다’가 될 위기다. 1999년 한국기술투자를 시작으로 25년간 벤처투자 현장을 지킨 윤 회장은 “스타트업의 대규모 구조조정과 폐업 등이 잇따르고 있는 지금은 매우 엄중한 시기”라며 “벤처시장의 성패가 ‘제조강국’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끌어올릴지를 좌우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 한국 경제의 최대 리스크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단연 고금리죠. 지난 30년간 금리가 내려오는 시대에 살았는데 금리 하향기의 4%대 기준금리와 지금처럼 상승기의 4%는 완전히 다릅니다. 소비심리에 악영향을 너무 많이 줍니다. 기준금리가 4%대로 오르면 개인의 유동성 위기가 부동산 등의 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이 큽니다. 금리는 수조 안의 물과 같습니다. 수위가 오르면 키 큰 사람 빼곤 다 죽죠. 결국 기업이 파산하고 사람이 죽어나가야 수위가 내려가는데, 그게 역사적으로 반복됐습니다.”

▷벤처투자 시장에 잠복한 위험은 무엇일까요.

“지난해 벤처펀드 결성액이 10조원을 돌파했지만 올해 대내외 상황은 심상찮습니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도 자금 조달에 실패해 도산할 수 있습니다. 스타트업이 올 하반기 투자 유치에 나서면 기업가치를 낮춰야 할 수 있는데 기존 주주가 반대하거나 창업자들이 동의하지 못해 투자받지 못하면서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유망한 벤처 분야를 찾을 수 있을까요.

“미국과 중국이 기술 패권주의 경쟁을 벌이면서 한국 제조업에 엄청난 기회가 생겼습니다. 2차전지 배터리 분야에서 우리가 중국과 맞붙어 이기기 쉽지 않았지만 ‘편 가르기’로 기회가 열린 것이죠. 챗GPT 열풍 덕분에 AI 반도체 분야도 좋습니다. 방산, 태양광 분야 제조 기술기업은 굉장한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틱톡, 티무 등 중국 플랫폼은 성공하는데 한국에선 이런 게 왜 안 나오나요.

“챗GPT를 만든 미국 오픈AI는 시드(초기) 단계부터 조 단위 투자금을 받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됩니다. 테크 분야는 내수용이 아니라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싸워야 합니다. 한국은 벤처시장 규모도 작지만, 글로벌 톱 수준의 딥테크 기업이 많지 않습니다. 솔직히 1조원씩 갖다 넣을 기업이 거의 없죠. 한국 경제는 제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빨리 싸게 잘 만드는 게 우리 강점이죠. 제조업이 더 성장하려면 기술로 가야 하는데 딥테크 기업이 별로 없는 게 현실입니다.”

▷CES 2023에서 최고 혁신상 20개 중 9개를 국내 기업이 휩쓸었는데요.

“혁신기업을 보면 미국, 중국과 경쟁할 정도로 우리가 잘하죠. 문제는 혁신 기술이 실제 삶을 변화시켜야 시장이 커지는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과거부터 해온 곳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이 혁신기업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11인승 승차 호출로 급성장한 타다가 2020년 기존 택시업계의 저항으로 결국 좌초됐죠. 지금도 로톡, 직방, 삼쩜삼 같은 혁신 스타트업이 전문가 단체의 저항에 부딪혀 제2의 타다가 되고 있습니다. 기존 세력의 저항은 컨트롤하기 힘들죠.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혁신과 규제 철폐가 이뤄져야 시장이 커지는데 계속 발목을 잡히고 있습니다.”

▷올해 모태펀드 예산을 크게 줄이자 벤처캐피털(VC)업계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큽니다.

“경제가 생각보다 잘 견디고 있지만 연결고리가 느슨한 쪽에서 위기가 터질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은 그게 부동산과 스타트업이죠. 연결고리가 터지면 불특정 다수가 포함된 산업이기 때문에 위기가 번질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모험자본은 민간 중심으로 가는 게 맞는 방향이지만, 고금리 시대엔 모험자본에 돈이 안 들어옵니다. 이럴 땐 정부가 마중물로서 바닥에서 툭툭 쳐주는 역할을 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연결고리가 약한 쪽에서도 적게 터지거나 안 터질 수도 있습니다.”

▷스타트업 폐업이 이어지며 경제활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산업은행, 기업은행, 시중은행 등이 모험자본 재원을 늘리고 역할을 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산업이 힘들 때 은행에서 수익 난 부분을 모험자본으로 가져오는 게 경제 선순환에도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소형 VC일수록 펀드 조성이 더욱 어렵습니다. 올해 추경을 통해 작년 수준의 모태펀드 예산이 확보될 수 있도록 국회를 설득할 예정입니다.”

▷가장 시급하게 처리돼야 할 벤처투자 관련 제도는 무엇인가요.

“자금 공급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벤처기업은 적절한 시기에 자금 공급이 안 되면 인력이 나가고 회사도 문을 닫게 됩니다. 민간 자금을 벤처투자 시장으로 유인하기 위한 수단이 빨리 마련돼야 합니다. 혁신기업에 쉽게 투자할 수 있는 공모 상장형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와 민간 모태펀드 도입을 위한 국회 법안 처리가 올해 불발되면 결국 내년 총선 이후로 미뤄지게 될 겁니다.”

▷올해가 최적의 ‘투자 빈티지’란 얘기도 있는데 VC 투자 집행은 늘어나지 않을까요.

“올해 1월 VC들의 투자 집행액이 전년 동기 대비 80% 급감했습니다. VC 투자가 늘어나려면 안개가 걷히고 방향성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라 올해 벤처투자는 관망하는 시장이 될 것입니다.”

▷자본과 벤처시장의 연결 고리를 강화할 방안이 있나요.

“데이터 통합으로 가능합니다. 대한민국 누구도 벤처투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신기술사업금융회사를 비롯해 은행·증권·보험도 벤처투자를 많이 하고 있지만 관련 데이터가 창업투자회사와 통합이 안 돼 있습니다. 벤처투자가 고용과 산업을 얼마나 창출하고 있는지 숫자로 얘기할 수 있어야 데이터에 기반한 효율적 정책도 펼칠 수 있습니다.”

▷데이터가 금융위원회와 중소벤처기업부로 쪼개져 있는데 통합이 가능할까요.

“데이터 통합은 제 임기 2년 동안 중점 과제입니다. 30년 넘게 사용해온 협회 이름을 한국벤처투자협회로 바꾸려는 것도 전체 모험자본을 대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신기사·은행·증권·보험을 회원사로 아우르기 위해 여러 기관을 만나 설득할 것입니다.”

■ 윤건수 회장은 1999년 VC업계 입문…600여 벤처·스타트업 발굴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은 공학도 출신으로 국내 벤처투자 문화가 자리잡기 전인 1999년 벤처캐피털(VC)업계에 입문했다. 지난 25년간 600개가 넘는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을 발굴·육성했다.

윤 회장은 1962년생으로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이후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수료했다. LG종합기술원 기술기획팀 연구원으로 시작해 한국기술투자(현 SBI인베스트먼트)를 통해 VC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LB인베스트먼트 기업투자본부장을 맡아 실무 경험을 쌓은 뒤 2012년 DSC인베스트먼트를 창업했다.

DSC인베스트먼트는 2016년 코스닥시장에 입성했다. 지난해 국내 VC 가운데 아홉 번째로 벤처펀드 운용자산(AUM) 1조원을 돌파했다. 윤 회장은 2017년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 육성하는 액셀러레이터(AC) 슈미트를 설립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600여 개 기업을 관리해온 윤 회장은 투자를 결정하기 위한 최우선 조건으로 ‘최고경영자(CEO)’를 꼽는다. 그는 “CEO가 걸어온 길, 성향, 인품을 보고 결정하는 게 90%라면 10~20%는 핵심 멤버의 경쟁력을 본다”며 “의미있는 기술 기업에 초기부터 투자해 오랜 시간 함께 간다”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