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신흥국이 경제 회복을 가로막는 3중고에 갇힐 위험이 크다는 진단이 나왔다. 팬데믹(전염병 대유행) 기간 부채가 늘었지만 저성장 늪에 빠지면서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 인상 채비를 하는 등 ‘긴축 발작’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도 신흥국엔 악재다. 코로나19가 신흥국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된다.

선진국-신흥국 성장 격차 좁아져

저성장·부채·금리인상…'3중 펀치' 신흥국 경제 덮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신흥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4.98%다. 선진국의 성장률 예상치는 이보다 1.35%포인트 낮은 3.63%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신흥국과 선진국 간 성장률 격차가 2000년대 들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16일 보도했다.

2010년 이후 신흥국은 선진국보다 2~4%포인트 높은 성장세를 유지했다. 2000년대 들어 이 격차가 1.5%포인트 아래로 내려갔던 적은 없다. 투자 위험이 큰 신흥시장에 외국 자본이 몰렸던 것도 가파른 성장률 덕분이다. 데이비드 루빈 씨티은행 신흥시장 책임자는 “성장세가 없다면 (신흥시장에 남는 것은) 위험뿐”이라고 했다.

신흥국은 선진국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나 치료제 보급률이 낮다. 선진국은 팬데믹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신흥국은 여전히 ‘팬데믹 경제’에 허덕이고 있다. 내수 경제에 보탬이 되던 관광업도 재개 시점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부채비율 높아진 신흥국

마틴 울프 FT 칼럼니스트는 ‘잃어버린 10년’의 유령이 신흥국을 찾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와 싸우기 위해 각국은 빚을 내야 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은 선진국보다 중위 소득 국가에서 더 가파르게 늘었다. 팬데믹을 계기로 신흥국은 선진국보다 경제 구조가 취약해졌다.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 6개 나라는 팬데믹 기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스리랑카는 올해 중국 등에 상환해야 하는 부채가 70억달러를 넘는다. 외화보유액은 30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 디폴트가 임박했다는 관측이다. 2020년 신용등급이 낮아진 51개국 중 신흥국은 44곳이다. 피치는 최근 터키의 투자 등급을 낮췄다. 가나 엘살바도르 등도 투자 위험 국가로 꼽힌다. 레베카 그린스펀 유엔 무역개발회의 사무총장은 “코로나19 유행 2년을 지나면서 부채, 인플레이션, 저성장 문제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74개 저소득 국가가 올해 상환해야 할 빚은 350억달러에 이른다. 이 중 53%가 채무위기에 빠질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신흥국 재정 상황이 악화하면 공공시설을 확충하거나 신규 투자할 자금이 끊겨 성장세마저 멈춘다. 코로나19 탓에 이미 많은 국가에선 경제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

Fed 금리 인상도 영향

세계 무역 성장세는 올해와 내년 급격히 둔화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코로나19 이후 반등한 소비 수요가 지난해를 정점으로 꺾이기 시작하면서다. 중국의 성장세가 멈춘 것도 신흥국엔 악재다. Fed의 금리 인상도 마찬가지다.

미국 금리가 오르면 신흥국 자산은 투자 매력이 떨어져 외국 자본이 빠져나갈 수 있다. 국제금융연구소에 따르면 중국을 제외한 신흥국 주식·채권시장에서 지난달 유출된 외화는 77억달러다. 달러 가치가 상승하면 달러 표시 채권을 상환하는 데 드는 비용은 늘어난다. 신흥국 화폐 가치가 떨어져 상품 대금을 달러로 받는 수출 기업엔 이득이란 분석이 있지만 물류 등 공급망 비용도 함께 늘기 때문에 기업 부담이 더 증가한다는 지적이다.

모든 신흥국 경제 전망이 어두운 것은 아니란 분석도 있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등은 환율 변동에 대응하기에 충분한 외화를 보유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 체질을 바꿔 버텨낼 힘도 키웠다. 신흥국 상당수는 Fed보다 먼저 금리 인상에 나섰다. 고금리에 물가가 안정된다면 투자 매력은 높아질 수 있다는 평가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