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세계 경제가 시름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란 시각이 많다. 수천 년간 금은 인플레이션 위험을 분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투자 수단으로 통했다. 올해 들어 금의 역할은 암호화폐가 대신하고 있다. 단기적인 물가 상승 위험을 분산하는 데 암호화폐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의미다.
올 들어 8% 하락한 금값
찬바람 부는 金…'인플레 피난처' 비트코인에 뺏기나
미국 뉴욕 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금 선물 가격은 올 들어 8% 넘게 하락했다. 올해 초 1트로이온스당 1947달러에 거래되던 금값은 22일 기준 1787달러까지 떨어졌다.

올해 미국과 유럽 등에선 물가가 급격히 뛰었다. 코로나19에서 회복한 뒤 급증한 소비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서다. 통상 물가가 오르면 금값도 고공행진을 한다. 화폐 가치가 떨어져 경제가 불안정해지면 안전자산인 금으로 돈이 몰리기 때문이다.

올해는 달랐다. JP모간에 따르면 올 들어 금 관련 상장지수펀드(ETF)에서 빠져나간 자금은 150억달러(약 17조6500억원)에 육박했다. 세계 ETF가 보유한 금도 급감했다. 지난달에만 ETF들은 금을 15.2t 내다팔았다. 아시아 ETF들은 금 보유량을 2.4t 늘렸지만 북미와 유럽 ETF는 각각 6.6t과 11.5t 줄였다. 세계 ETF가 보유한 금은 지난달 기준 3592t으로 올해 4월 이후 가장 적은 수준이다.

두 금융자산은 투자 성적도 극명하게 갈렸다. 올해 1월 1일 금과 비트코인에 똑같이 100달러를 투자했다고 가정하면 비트코인 투자자는 자산이 220달러 넘게 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반해 금 투자자 자산은 90달러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금 자리 대신하는 비트코인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지자 금값은 상승동력마저 약해졌다. 금 시장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향한 곳은 암호화폐다. 미 코인거래소에서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 20일 사상 최고가인 6만7000달러에 근접하게 치솟았다. 올해에만 비트코인 관련 펀드로 30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유입됐다.

암호화폐에 등을 돌렸던 전통 자본시장에서도 비트코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투자 위험 분산 수단으로 암호화폐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JP모간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기관투자가들이 비트코인을 금보다 나은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피델리티에 따르면 최근 헤지펀드 10곳 중 8곳이 암호화폐를 포트폴리오에 포함하겠다고 답했다.

금 투자자들도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보석투자그룹인 스프랏자산운용의 존 해서웨이 매니저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당장 우리의 전략에 대한 관심은 제로 수준”이라며 “비트코인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생긴 화폐 가치 하락 위험에 대해 금 투자자와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장기적으론 금값 오를 것”
출시된 지 12년밖에 되지 않은 비트코인이 2000년 넘게 거래된 금의 자리를 대체할 정도로 성장한 비결에 대해 전문가들은 희소성을 꼽았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각국 중앙은행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앞다퉈 화폐를 찍어냈다. 그 결과 돈의 가치는 하락했고 물가는 급등했다. 반면 비트코인은 그 숫자가 2100만 개로 제한되도록 설계됐다. 암호화폐를 불법으로 판단해 규제를 강화한 각국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통화정책을 통해 암호화폐를 육성한 셈이다.

하지만 장기적 인플레이션 위험을 분산하기에 아직 암호화폐는 효율적 수단이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데다 가격 변동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각국 정부가 규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암호화폐 투자 위험을 키우는 요인이다. 코로나19가 촉발한 물가 상승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평가가 우세해지면 금값은 결국 상승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