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곳 없는 뭉칫돈…단기금융상품 '쏠림' 심화

"숏머니 흡수" CP발행 60%↑

이랜드월드·두산·대한해운 등
회사채시장 소외 기업도 잇단 발행
금리 하락과 통화 공급 확대로 늘어난 유동성이 단기금융상품에 쏠리고 있다.   한경DB

금리 하락과 통화 공급 확대로 늘어난 유동성이 단기금융상품에 쏠리고 있다. 한경DB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가 연일 사상 최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갈 곳 없는 단기 투자자금이 기업어음(CP) 등 단기금융상품에 몰리면서 한동안 제자리걸음하던 CD 유통 금리까지 빠르게 끌어내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투자 수요가 늘어나면서 비우량 기업의 CP 발행도 덩달아 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과도하게 단기 자금에 의존했다가 경기 회복이 늦어지면 유동성 불안을 키울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CD금리 9일간 0.13%P 급락
넘치는 유동성…비우량기업들 '3개월짜리 어음'으로 자금 조달

17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CD 91일물 금리는 지난 14일 연 0.65%로 0.02%포인트 하락했다. 4일 이후 9거래일 동안 0.13%포인트나 떨어졌다. 한 증권사 CD 거래 중개인(브로커)은 “금투협에 CD 호가를 보고하는 10곳의 증권사 중 일부가 연일 낮은 금리를 써내면서 고시 금리가 이례적으로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며 “최근 장기금리가 소폭 오름세인 것과도 대조적인 현상”이라고 전했다.

거래량이 많지 않은 CD 금리는 기준금리 조정 때를 제외하면 크게 변동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 0.50%로 낮춘 지난 5월 28일에는 연 0.81%로 0.21%포인트 급락했다. 이후 지난 3일까지 두 달여 동안 하락폭은 0.03%포인트에 그쳤다.

채권시장 참여자들은 최근 CD 금리 하락 배경을 기업과 가계의 대기성 보유현금 확대에 따른 단기금융상품 수요 증가에서 찾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지원자금 공급으로 시중 통화량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난달 CP 발행 60% 급증
넘치는 유동성…비우량기업들 '3개월짜리 어음'으로 자금 조달

단기금융상품 시장에 돈이 몰리면서 단기신용등급 ‘A3’ 이하 기업들의 CP 발행도 빠르게 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전체 7개 투자적격 단기등급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A3’와 ‘A3-’ 등급 비금융 일반기업 CP 발행금액은 지난달 4233억원을 기록했다. 전월 대비 60% 넘게 늘어난 규모다. 자금조달 비수기인 이달 들어서도 14일까지 71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이들 기업의 CP 발행금액은 4월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671억원까지 움츠러들었다가 5월 840억원, 6월 2598억원으로 증가세다. 주요 발행 기업은 이랜드월드(7월 기준 1388억원), 두산(543억원), SK텔레시스(485억원), 대한해운(420억원), 동국제강(399억원), 유진기업(200억원) 등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CP 외에 전자단기사채(STB) 시장에서도 비슷한 금액을 조달하고 있다. 한 증권사 CP 운용 담당자는 “코로나19로 얼어붙었던 단기금융상품 수요가 눈에 띄게 늘면서 비우량 기업에까지 자금이 흘러들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 회사채 등급 기준으로 모두 ‘BBB+’ 이하 평가를 받고 있는 이들 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공모 회사채를 한 건도 발행하지 못했다. 경기 악화 우려로 장기 투자자금이 우량 등급 채권에만 쏠린 탓이다.
‘위기의 불씨’ 우려도
비우량 기업 CP의 발행 급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과도하게 단기 자금에 의존하다가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차환에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경기침체 속에서 나타났던 중견 그룹사들의 CP 남발은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연쇄 부도 충격을 낳기도 했다.

경기 전망을 부정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신용평가사들은 국내 기업의 신용등급 강등 추세가 하반기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유동성 관리를 주문하고 있다.

한 증권사 CP운용 담당자는 “갈 곳 잃은 자금이 우량 공기업 CP 금리를 연 0.5%대까지 떨어뜨린 데 이어 CD와 비우량 기업 CP 금리까지 낮추고 있다”며 “다만 코로나19와 미국 대선 등으로 인한 경기 불확실성 확대로 장기 금리까지 이런 분위기가 흘러가지는 못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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