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9월12일 오후 7시31분

이용한 원익그룹 회장은 지난 1월 30년 경력의 투자은행가 출신 임석정 SJL파트너스 회장에게 다급하게 ‘SOS’를 쳤다. 미국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가 세계 3대 실리콘 업체 중 하나인 모멘티브퍼포먼스머티리얼(이하 모멘티브)을 중국 기업에 매각하려 해서다. 실리콘과 세라믹은 반도체 등의 핵심 원료다. 원익으로선 모멘티브가 중국 기업으로 넘어가면 반도체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지 못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원익은 삼성전자의 주요 협력 업체 중 하나다. 향후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KCC-원익-SJL’ 동맹의 시발이었다.
모멘티브 품은 KCC, 실리콘 세계 2위로… 올 최대 해외 M&A 성공
◆대기업·중견기업·PEF ‘삼각동맹’

미국 모멘티브는 2006년 아폴로PE가 제너럴일렉트릭(GE) 핵심 계열사이던 GE어드밴스트머티리얼즈와 GE바이엘실리콘, GE도시바실리콘 등을 인수합병해 출범시킨 회사다. 미국의 다우듀폰, 독일의 바커와 함께 세계 3대 실리콘 및 석영·세라믹 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매출이 2조6000억원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 매출의 90%는 실리콘, 나머지 10%는 석영·세라믹 부문에서 나온다. 글로벌 규모의 실리콘 사업을 원하는 KCC와 석영·세라믹사업부 인수 기회를 찾던 원익이 SJL파트너스와 의기투합해 인수전에 뛰어든 이유다.

이 회장 제안에 임 회장이 손잡았지만 걸림돌이 등장했다. 원익이 필요한 모멘티브의 석영·세라믹 사업부만 인수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투자금 회수를 위해 모멘티브를 매물로 내놓은 아폴로가 원익을 위해 매출 비중이 10%에 불과한 석영·세라믹 사업부만 따로 떼어내 팔 리 없었다. 그렇다고 3조원이 넘는 거대 해외 기업을 원익이 독자적으로 사는 것도 무리였다.

지난 3월 정몽진 KCC 회장이 임 회장의 인수 계획을 접하고 컨소시엄 참여를 전격 결정하면서 돌파구가 열렸다. KCC는 글로벌 시장에서 실리콘 분야 선두업체로 성장하기 위해 모멘티브를 인수하려다 무산된 경험이 있었다.

◆반도체·태양전지 원료 분야 글로벌 강자로

KCC는 모멘티브 인수로 단숨에 세계 24개 생산공장에서 연간 30만t의 실리콘을 생산하는 세계 2위 회사로 도약한다. 연간 6만t가량인 실리콘 생산량이 단숨에 네 배 이상 늘어난다. 모멘티브의 브랜드와 수천 건의 원천기술, 4000곳 이상의 고객사를 통한 글로벌 네트워크도 확보한다.

원익그룹은 반도체 재료인 석영·세라믹 제조업체인 원익QnC를 인수 주체로 내세웠다. 국내 석영 및 세라믹 시장 점유율이 각각 37%, 26.6%로 1위인 원익QnC는 세계 1위 석영·세라믹업체로 부상한다.

실리콘은 반도체 태양전지뿐 아니라 섬유, 종이, 건축, 토목, 화장품 등 실생활에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모멘티브는 세계 최초의 산업용 실리콘 생산기술, 샴푸와 린스가 결합된 투인원 샴푸, 자외선(UV) 차단기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용 실리콘, 실리콘 폴리에테르를 사용한 섬유유연제 등 실리콘 분야에서 대부분의 ‘세계 최초’ 기록을 갖고 있다.

모멘티브 품은 KCC, 실리콘 세계 2위로… 올 최대 해외 M&A 성공
SJL, KCC, 원익 세 회사의 지분인수 비율은 각각 50 대 45 대 5로 정했다. 글로벌 경영을 잘 아는 PEF(SJL)가 앞장서 모멘티브 경영진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포석이다. 동시에 KCC와 원익 모두 국내 시장이 주력이어서 대미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 승인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낮췄다는 평가다. 이 같은 인수구조는 글로벌 화학소재 기업이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의 11배에서 거래되는 데 비해 KCC컨소시엄이 모멘티브를 7배에 사들이는 촉매가 됐다.

KCC컨소시엄은 모멘티브 지분 100%를 사들인 뒤 실리콘 사업부와 석영·세라믹 사업부를 분리할 계획이다. 실리콘 사업부를 원하는 KCC와 석영·세라믹 사업부를 희망하는 원익의 이해 관계를 맞추기 위해서다. 두 사업부 모두 SJL이 50%의 지분을 갖는다. 거래가 마무리되면 실리콘 사업부는 SJL과 KCC가 5 대 5, 석영·세라믹 사업부는 SJL과 원익이 5 대 5의 지분을 나눠 갖는 구도가 된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회사를 상장시켜 SJL은 투자금을 회수하고 KCC와 원익은 남은 지분 50%를 갖고 경영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PEF가 거래 기회를 찾아 성사시키면 기업이 인수 회사를 경영하는 이상적인 SI(전략적투자자)와 FI(재무적투자자)의 결합 구조”라고 말했다.

◆“인수 부담 크지 않다”

모멘티브 인수대금 30억달러 가운데 18억달러는 인수금융(M&A 대출금)과 모멘티브가 보유한 내부현금으로 지급하기 때문에 KCC와 원익은 각각 5억4000만달러(약 6100억원)와 6000만달러(675억원)를 분담한다. KCC가 갖고 있는 현금성자산 3조5000억원의 6분의 1 수준이다. KCC가 연 6만t의 실리콘 생산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15년간 투입한 금액과 비슷한 규모다. IB업계 관계자는 “KCC는 15년치 투자금을 한 번에 쏟아부어 네 배의 생산능력과 원천 기술, 글로벌 브랜드, 영업 네트워크 등을 일거에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말 임 회장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운 SJL파트너스는 셀트리온홀딩스, 비제바노(금강제화 특수관계사)에 이어 모멘티브 투자를 성사시킴에 따라 출범 1년도 안 돼 운용 규모(AUM) 1조원을 넘어서게 됐다. 매각 주관사는 골드만삭스, 인수 자문사는 UBS가 맡았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