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금리 보다 높은 깐깐한 사용조건 적용
정부, '돌고 돌아' 재정 통한 국책은행 자본확충 모색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다는 논란 끝에 11조원 규모의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가 출범했지만 실제 펀드를 통한 자본확충이 이뤄질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국책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금융시장이 크게 불안한 상황이 아니면 쓰기 어려운 깐깐한 조건이 붙었기 때문이다.

이에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의 자본확충에 한은을 참여키려던 정부는 자본확충에 필요한 재원을 추가경정예산이나 내년 예산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17일 "자본확충펀드가 실제 집행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며 "그야말로 비상계획(컨틴전시 플랜)의 일환이 됐다"고 말했다.

자본확충펀드는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출의 부실로 산은·수은의 자본이 부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됐다.

한은이 돈을 찍어 기업은행에 대출해주면 이를 바탕으로 펀드를 만드는 구조다.

펀드는 산은·수은의 조건부 자본증권(코코본드)을 매입해 국책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높여주게 된다.

코코본드는 평상시에는 자본으로 인정받지만 금융위기가 오면 주식으로 강제 전환되거나 휴짓조각(상각)이 되는 채권이다.

전체 펀드 규모는 11조원이지만 한꺼번에 지원되는 것은 아니고 국책은행의 자금소요가 있을 때마다 지원하는 '캐피털 콜' 방식을 채택했다.

발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두 가지 조건도 따라붙었다.

우선 산은과 수은이 코코본드를 발행하더라도 이를 먼저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금융 불안 등으로 코코본드가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을 때만 자본확충펀드에 기댈 수 있다.

현재 산은과 수은이 발행한 코코본드는 연 2.1∼2.2%의 금리로 시장에서 충분히 소화되고 있다.

한은 대출금리가 시장금리 이상으로 적용된다는 점도 국책은행이 쉽사리 자본확충펀드에 손을 벌리지 못하는 이유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자본확충펀드는 국책은행의 경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금융 불안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계획"이라며 "(국책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시장금리 이상을 적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말했다.

국책은행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연 2.1% 금리로 코코본드를 발행할 수 있는데 굳이 2.4% 수준의 더 높은 금리로 자본확충펀드를 이용할 유인이 없다.

한은 대출금리에 신용보증기금 보증 수수료,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의 펀드 위탁관리 수수료 등 자본확충펀드 참여 기관이 부담하는 각종 비용이 더해지면 펀드를 통한 코코본드 발행 비용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자본확충펀드가 거의 활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은 대출금리는 국책은행의 자금 지원 요청이 있을 때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하게 된다.

금리가 매번 달라질 수 있다.

한은 등 자본확충펀드 참여 기관은 한은 대출금리를 어떤 기준으로 정할지, 금리 가산을 어떻게 할지 논의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놓는다는 계획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까다로운 금리 조건이 없었던 2009년 은행자본확충펀드도 20조원 중 4조원만 쓰였는데 지금은 유동성이 넘쳐 흐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본확충펀드가 쓰일 일이 더 없을 것"이라며 "위기 시 국책은행 건전성을 지키는 수단을 확보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결국 두 달여간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해 치열한 논의를 벌였던 정부는 돌고 돌아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재정 투입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셈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자본확충펀드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인한 여파가 급격히 나타나거나 중국 경제가 경착륙하는 등 금융시장이 경색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국책은행에 대한 재정 투입이 불가피해졌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chopark@yna.co.kr